흑해(1)
[1]
독재 국가 민중들의 애환은 깊고도 저리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순간 전통이 되어 그들의 음악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슬라브인들의 주무대였던 지금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관통해 흑해까지 이르는 드네프르 강을 따라서는 '카자리아(Khazaria)'의 ‘슬라브인(Slav, 노예를 뜻하는 영어 단어 ’slave‘는 이 종족 명칭에서 유래했다) 노예시장’이 활성화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곳에선 신석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까지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초원지대(Pontic steppes)에서 주로 활거했던 호전적이고 가부장적인 인도-유러피안 유목민족인 쿠르간이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는 과정에서, 이후 이 지역으로 진출한 모계 공동체 이란-사우로마티안(Irano-Sauromatian)과 융합함으로써 유럽과 근동(소아시아) 정체성의 기원이 되었다. 나아가 이들은 유라시아 지역에서 가부장적인 문화와 모계 사회의 전통이 묘하게 혼합된 고대 유목 문명이 형성되는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역사의 흔적들은 남부 러시아를 포함한 흑해 지역과 중앙 아시아 지역들을 여행하다 보면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거대한 어머니상이다. 호전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이들 지역에서는 그와 비등하게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여성인 ‘어머니(조국 혹은 토지 등에 대한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함)’에 대한 숭배 역시 뿌리 깊게 남아 면밀히 이어져 왔는데, 무기를 들고 있는 강인한 여전사 이미지의 어머니상이 바로 그와 같은 전통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쿠르간과 사우로마티안의 융합은 이후 흑해와 아조브해 연안 지역에서 이들의 계승자인 스키타이와 아마존 전사들의 강력한 남녀 혼성 결합을 태동시키기도 했다. 흔히들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 밀림의 여전사들로 착각하는데, 아마존 여전사들, 즉 다시 말하면 아마조네스는 본래 코카서스와 소아시아 지역에 거주했던 여성 부족을 일컫는 말로서, 이들은 활쏘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가슴을 도려낼 정도로 강력한 의지와 전투력을 지녔던, 오직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모계 공동체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호전적이고 가부장적이면서도 따스한 모성이 가득한 흑해와 아조브해를 둘러싸고 있는 이 지역들의 전통 음악을 좋아한다. 이들 음악엔 우리네 전통 정서인 ‘한(恨)’과 같은 구슬픔이 짙게 베어 있는데, 그 구슬픔엔 지난한 고난으로부터 이미 해탈한 듯 한 민중들의 열정 가득한 허무와 애절함이 가득 담겨 있다. 그리고 이른바 이와 같은 정서를 나는 ‘깊은 슬픔’이라고 정의한다. 미루어 짐작컨대 깊고도 슬픈 민중들의 노래는 지구의 땅을 돌아 먼 우주의 허공으로 먼지처럼 흩뿌려져 압제의 그늘 아래서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민중의 열망과 소망을 투사할 것이다.
[2]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는 미인과 정교회 성당이 많은 성스러운 도시다. 이는 중의적 의미로서 첫 번째로는 아름다운 정교회 성당들이 많은 신앙의 도시라는 점에서 성(聖)스럽다는 의미이며, 다음으로는 유흥을 좋아하는 유럽인이나 중동, 인도 등지의 부호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여성들이 클럽이나 바에서 몸과 웃음을 파는 가성비 좋은 섹스 관광지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성(性)스럽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 갈 수 없는 상황이 됐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 나는 비자 문제로 러시아를 떠나야 할 때면 대체지로서 같은 러시아어 권역인 우크라이나를 종종 찾곤 했다. 우크라이나는 흔히들 알고 있듯이 미인이 많은 나라다. 유럽 내 최빈국 중 하나이기 때문에 물가도 싸고 여전히 러시아어가 공용어처럼 통용되고 있어 러시아어를 연습하기에도 좋다. 동시에 부정부패가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해 있으며, 사기꾼이나 강도도 많아 이방인이 혼자 다니기엔 다소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10년 넘게 해외 생활을 해 왔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한번도 당해보지 않았던 사기를 키예프 중심가 시내에서 백주 대낮에 당해본 황당한 경험이 있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마이단 광장 근처 거리에서 무자비한 집단 폭력이 자행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도 있다.
물론 좋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내가 우크라이나에 체류하던 시절만 해도 자국 내 오랜 분쟁은 물론 돈바스, 크림반도 등에서 러시아와 벌인 전쟁 등으로 인해 경제가 폭망하다시피하고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탓인지 흉흉한 민심이 일상의 내피에 도저히 깔려 있었고, 우울과 냉소가 무표정한 민중들 마음 속 한 구석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러시아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 정부가 주장하듯이 러·우 전쟁의 발단이 된 우크라이나 내 극우 파시스트들의 존재도 실체하며, 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명 스킨헤드라 불리면서 파시즘을 추종하고 외국인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지금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돈바스 지역에서 활동 중인 아조브민병대는 소련 몰락 후 러시아내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했던 극우파들로서, 이들은 2천 년대 후반 ‘극단주의 배제’라는 법적인 차원에서 러시아 정부가 제재를 강화하자 우크라이나로 이동한 후 히틀러를 추종하며 슬라브 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웠던 이력이 있다. 그런데도 우크라이나는 국가 차원에서 반러 세력인 이들을 지원하며 자국 내 러시아인 박해를 묵인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주장대로라면 결국 이게 발단이 돼 지금의 러·우전쟁이 발발한 셈인데, 이는 사실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세월이 참 무상하게도 내가 처음 이 책을 구상하며 집필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난 지금의 전쟁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 2022년 초반에 시작된 전쟁은 이미 거의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고, 종전의 기미나 가능성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내 주요 러시아어 사용권이자 사실 상 러시아계 주민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는 루한스크, 도네츠크 주 등 돈바스 지역에서의 러시아인 해방과 구제를 목표로 자칭 ‘특수군사작전’을 수행하고 있지만, 사실 더 큰 목표는 이 지역에 매장된 희토류 등 엄청난 양의 지하자원을 차지하고, 구소련 수준의 지위 회복 및 영토 확장을 통해 미국과 유럽 연합 등 서구 세력에 맞설 수 있는 반서방 동맹을 구축해 자신의 종신 집권을 위한 정치적 장악력을 공고히 하는 데 있다.
하지만 푸틴의 선전이나 바람과는 달리 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은 전쟁에 대해 확고한 반대 의사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해외에 보도되고 있지는 않지만, 모스크바, 뻬쩨르부르크 같은 대도시에서는 반전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다. 젊은이들, 특히 교육 수준이 높고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푸틴 정권에 대한 반감을 표하며 전쟁 중단을 요구하고 있고, 암울한 러시아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해외로 이주하는 러시아인들도 많다. 어릴 적부터 행해진 광범위하고 철저한 세뇌 교육으로 인해 자유 의지 없는 로봇처럼 변해 버린 다수 중국인들과는 달리 러시아 민중은 역사적으로 성공한 혁명의 경험을 내재하고 있고, 사고와 생활이 이미 서구화 되어 있어 푸틴의 의지대로 극우화될 확률은 지극히 낮은 게 현실이다. 사실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위해 러시아 뉴스를 보는 나를 만류하는 현지인 친구들도 많다. 그들은 이미 그것이 프로파간다(propaganda), 즉 선전 선동이란 걸 알고 있고, 시골에 사는 자신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나이 많은 부모가 교묘하게 편집되고, 악의적으로 조작된 뉴스 정보를 액면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푸틴은 반나치화를 기치로 내걸며 특별 군사 작전으로 포장된 사실상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지만, 본인 스스로가 제 2의 히틀러가 되어 러시아를 나치화의 길로 걷게 하는 현실 자체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관점에 따라서는 제 2의 무솔리니라고도 볼 수 있는 시진핑의 중국과 더욱 밀착하며,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전체주의 체제로 감으로써 러시아를 최소 10년 내지는 20년 정도 퇴보시키고 있는 현실은 러시아를 사랑하고 제 2의 고향처럼 여기는 나의 입장에선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지금 전쟁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도 못한다. 모든 언론과 인터넷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으며, 반전을 주장하는 사람은 일반인, 아티스트, 정치인 할 것 없이 모두 감옥으로 보내지고 있다. 철의장막이었던 소련 시절로 회귀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를 단지 노망난 노인네의 미친 짓이라고 치부하기엔 국제 정세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고, 신냉전 혹은 3차세계대전까지 걱정해야 할 정도로 지극히 위험하다는 건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의 전쟁은 러시아 민중들의 삶은 물론 전 세계 경제와 일반인들의 삶에까지 광범위하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고, 살인적인 물가 상승을 야기하며 정치·경제·금융·산업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체제 변환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바이든 정권은 이 전쟁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인 노력을 포기한 체 푸틴의 폭주를 방기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사실 바이든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전쟁을 조장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는데, 선거를 앞둔 노쇠한 정치인의 작은 탐욕과 오산이 불러온 결과는 실로 재앙과도 같았다. 사실 상 전쟁 방지를 위해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한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프랑스의 젊은 대통령 마크롱 뿐이었고, 푸틴, 바이든, 시진핑 등 노쇠한 정치 지도자들은 평범한 국민들을 희생양 삼아 개인적인 야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다. 무고하게 희생되고, 지금도 역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정말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단순히 노인정치의 폐해라고 보기엔 선거를 기반으로 하는 현재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하고,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문화가 얼마나 민중들의 뼛속까지 악영향을 미치며 사회전반에 걸쳐 암적으로 작용하는지 그 폐해를 똑똑히 목도하는 지금이 아닐 수 없다.
https://youtu.be/eZ2s9IT1gvg?si=q5kVtSmS8T2lb8-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