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스에서(1)
[1]
성서 속 노아의 방주와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치다 걸려 처형당한 산들이 있다는 신앙과 신화의 땅 카프카스, 영어명으로는 코카서스인 이 아름다운 산악 지역의 여인들은 짙고 검은 머리와 커다란 눈 그리고 작은 체형을 지니고 있다. 카프카스 자체가 지리적으로 서양과 동양의 경계에 있는 만큼 이들의 외모 또한 서구적이면서도 동양적인 특징을 고루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서양과 동양의 경계인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는 좀 더 서구적인 외모에 가깝다.
내가 코카서스 여인들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코카서스 여인들과 관련해 직간접적인 인연과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 실수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열차에 오른 내 눈길을 사로잡은 여인과 우연히 말을 섞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도움으로 열차에서 내려 길 안내를 받았는데 그녀는 아르메니아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난 생소했던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지역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고, 튀르키예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 인종학살의 비극도 알게 되었다. 타르투에서 공부하던 시절엔 함께 공부하던 조지아 출신 여자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특히 한 친구와는 워낙 나이 차가 커서 연인 관계로 발전하진 못했지만 일종의 썸을 탄 적도 있었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이슬람 문화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혼전 순결을 중시하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커플의 연애나 결혼에 대해서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가깝게 지냈던 한 여자 사람 친구도 아버지가 조지아계였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생물학을 연구하던 친구였는데 순한 인상과는 달리 내면이 아주 강인한 여성이었다. 산을 아주 좋아하는데 험한 코카서스 산악 지역을 몇 주에 걸쳐 등반하며 산 속에서 백패킹을 할 정도로 강철 체력이기도 했다. 이 친구와 함께 나는 처음 조지아 땅을 밟아보았는데, 카프카스 등반을 마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나는 모스크바에서 비행기편을 이용해 터키와 인접한 조지아 제 2의 도시 바투미로 갔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그녀와 연락을 주고 받았고, 저녁 늦은 시각 세차게 내리는 열대 강우를 뚫고 오랜 등반으로 인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그녀와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바투미 시내 중심가에서 조우했다.
우리나라에선 워낙 생소한 지역이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지만 조지아는 튀르키예와 더불어 러시아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휴양지 중에 한 곳이고, 특히 바투미는 아름다운 해안과 이국적인 풍광 그리고 따뜻한 날씨 덕에 여름 휴양지론 아주 제격인 곳이다. 거기에 더해 물가도 싸고 음식까지 맛있으니 금상첨화 아닌가? 아무튼 열대성 강우인 스콜에 흠뻑 젖은 우리는 그녀가 직접 예약한 호스텔을 찾아가 숙박했는데, 유쾌하고 친절했던 조지아인 호스텔 사장은 문법이 엉망인 러시아어를 구사했다. 그래서 내심 나는 구 소련 출신 사람보다 정확한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스스로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한편, 흑해는 조지아의 유일한 바다인데, 바투미 인근 바다는 조지아 내에서 가장 수심이 깊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바투미는 흑해를 통해 이스탄불의 보스포로스 해협을 관통하는 코카서스 해상 교역의 중심지이자, 조지아의 거점 항구도시가 되었다.
바투미 항구에는 니노와 알리라는 약 8미터 높이의 스테인레스 강철로 만들어진 독특한 남녀 조형물이 있다. 니노는 조지아에서 가장 흔한 여성 이름이며 조지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에서 기원했고, 알리는 주지하다시피 가장 흔한 이슬람 남성 이름 중 하나이다. 이 조형물은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며 서로 등을 지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하다 마침내 하나로 합쳐지는데, 이는 종교적인 이유로 함께 하기 힘들었던 젊은 두 연인이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끝내 자신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사랑을 완성함을 상징한다. 실제로 이 조형물은 조지아 공주 니노와 아제르바이잔 귀족 알리의 고난에 찬 사랑을 다룬 쿠르반 사이드의 유명 소설 ‘알리와 니노’에 착안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서구로 치면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야기라고나 할까? 인종과 국가 그리고 가문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비극을 맞는 젊은 연인의 이야기라는 점에선 공통점이 있지만, 니노와 알리는 전쟁과 반목 속에서도 정교와 이슬람이라는 극단적인 종교적 장벽을 넘어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고 마침내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간다는 점에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나 로미오와 줄리엣보다는 더 희망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석양이 질 무렵 항구에서 닿을 듯 닿을 듯 멀어지며 계속 엇갈리다가 결국엔 하나로 합쳐지는 니노와 알리의 벌거벗은 듯 한 조형물을 보고 있노라면, 소설 속 이야기처럼 낭만적인 애수나 서사보다는 은근한 에로틱함에 달뜨는 기분이 더 커지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2]
헐리우드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위트 있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로 남녀 간의 우정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난 이성간의 우정을 크게 믿지 않는다. 당연히 남녀 간 우정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영원하리라는 확신은 없다. 시간이 지나고 각자의 삶에 바빠질수록 소위 세속의 우정이라는 것은 의리로 똘똘 뭉친 전우의 관계로 진화하지 못하고 그저 흔한 친구 사이로 희석되거나, 자전했던 두 개의 삶이 어느 순간 공전의 과정을 거치며 애정의 형태로 변화하고 만다는 게 내 개인적인 소견이다.
난 결국 그녀와 전우의 관계도, 공전의 관계도 되지 못했다. 그저 한때 가까웠던 지인으로 서로의 기억 속에 남아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을 뿐이다. 단 둘이 탄 바투미의 대관람차에서 나는 그녀에게 키스해도 좋은 지 물어봤다. 순간 살짝 당황한 듯 보였던 그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당연히 ‘노우(no)’였다. 나를 잘 아는 친구나 지인들은 내가 상당히 엉뚱하고, 때로는 예측 불가능한 성격이라는 걸 안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듯 보이지만, 파격적이고 충동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 역시 알 것이다. 내 캐릭터는 그래서 매너 있고 평범한 듯 보이지만 특이하고 비범하다. 동시에 학자와 예술가가 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인간들은 내면에 다양한 ‘자기’들을 가지고 산다. 나는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았고, 다양한 것이 되어 많은 것들을 해보고 싶은 꿈이 있었던 것 같다. 되도록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세상과 인간을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진정한 나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진정한 나의 소울메이트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리라. 나는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진취적이다. 통합이 아닌 융합을, 중도가 아닌 초월을 지향한다. 파괴적인 혁신을 추구했지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경계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가끔 예측 불가능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게끔 만들었던 것 같다. 그것은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랬고, 이성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런 내적 방황은 때론 우유부단함으로, 때론 무모함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바투미에서의 ‘키스 부탁 사건’은 한낱 해프닝으로 귀결됐고, 남은 며칠 동안 우린 제법 유쾌하고 보람 있는 여행을 함께 했다. 아름다운 바투미의 해변과 자연을 만끽하며 파도가 넘실거리던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고, 발바닥이 닳도록 거리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풍광과 맛있는 음식으로 눈과 배를 채웠다. 그렇게 3일 밤낮을 바투미에서 보내고 우린 기차 편을 이용해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로 향했다.
https://youtu.be/FHQWSpULnLM?si=_Echd-DtH9tH5Zr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