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신화의 땅

카프카스에서(4)

by 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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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이 ‘편력의 시간’이다 보니 아마도 상당수의 독자는 이성(異性)과 관련된 의미의 ‘편력’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는 그 동안 무수히 많은 여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들 모두와 진지하게 사귀거나 깊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아니고, 소위 말하는 ‘사랑과 우정 사이’ 혹은 ‘썸’과 같은 그런 관계는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것도 ‘여성 편력’이라면 편력이기도 하겠지만, 나에겐 솔직히 진정한 연애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과 갈증이 있다. 나에게 여성 편력증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성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내 반쪽을 찾고 싶은 사랑에 대한 갈증일 것이다. 난 솔직히 여성 뿐 아니라 일반 지인들과의 관계도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일반인들에 비해 난 국내외를 막론해 정말 많고 다양한 계층과 국가 출신의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기지 않고 교류하는 친구나 지인, 심지어 친인척의 수는 손에 꼽힐 정도이다. 그 이유가 뭔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나에게 내가 잘 모르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너무 자주 직장과 지역과 도시와 국가를 옮겨 다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인간관계와 관련한 나의 이러한 이력은 가끔 스트레스를 안긴다. 하지만 내 딴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나의 돈과 에너지와 열정과 시간을 그들을 위해 쏟아 부은 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건 썸을 탔거나 교제를 했던 여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한 번도 번듯한 가정을 꾸려 보지 못한 체 지적 이성(理性)이 아닌 또 다른 이성(異姓)에 대해서도 편력하고 있다. 내가 세상의 지역들을 탐구하고 이들 지역들을 떠도는 것이 이성적 편력이라면, 진정한 반쪽을 찾는 여정은 아마도 감성적 편력이리라. 내가 종교가 아닌 진정한 신앙을 희구하는 것이 이성적인 의미에서의 성스러움에 대한 편력이라면, 진정한 사랑을 희구하는 것은 감정적인 의미에서의 성적 아름다움과 행복에 대한 편력이리라.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사랑은 뭘까? 굳이 한 여자와만 사랑을 나누고 가정을 가져야만 하는가? 나는 가끔 성적 쾌락에 대해 강한 충동을 느끼지만, 그건 대부분 늘 혼자이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일탈 욕구에 불과할 때가 많다. 나는 다른 한편으로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아름답고 파격적인 혁신이 담긴 작품을 창조하고 싶은 욕구가 넘쳐난다. 이런 욕망이 현실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못할 때 난 극심한 괴로움과 우울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좌절감은 나를 헤어 나오기 힘든 외로움의 늪으로 빠트려 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종국에는 스스로에 대한 비참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난 종종 술을 찾는다. 되도록 일찍 잠들어 오늘의 괴로움을 망각하고 리셋된 기분으로 내일 새로 시작하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그런 식으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가시지 않는 영혼의 갈증과 외로움의 고문만 지속될 뿐이다. 이런 이유로 난 늘 새로운 걸 찾는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지역, 새로운 문화, 새로운 공기, 새로운 볼거리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 돈이 많이 드는 취미나 먹거리, 유흥이나 관광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많이 걷고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새로움을 나는 찾는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걸으며 대화할 수 있는 새로운 여성이나 마음이 맞는 친구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나의 끝없는 편력의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안주하고 싶지만 그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나의 운명. 평범한 직장인을 꿈꾸었지만 평범하지 않은 프리랜서의 삶을 살고 있는 나. 여우같은 아내, 토끼 같은 자식과 함께 하는 단란한 가정을 꿈꾸었지만 언제나 홀로인 지금 나의 처지. 진득하게 한 곳에 머물며 살고 싶지만 끊임없이 이동하고 마는 유목민 같은 생활.

바램은 늘 현실과 반대였고 여전히 반대이다. 나의 운명은 나의 바램이나 계획과는 달리 끊임없이 충돌하는 욕망과 고뇌, 그리고 예기치 않게 발생하며 변화하는 상황들에 의해서 움직였다. 나는 늘 정주하지 못하고 이동했다. 그리고 거기에 나의 의지와 열망이 더해져 멈추지 않는 편력이 됐다. 불안은 도전이 되고, 갈증은 끝내 채워지지 않아 편력의 새로운 이유를 낳는다. 나의 바램은 앞으로도 절대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계획은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내 길을 간다. 그것이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방증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8]


아르메니아에선 코냑이 유명하고, 조지아에선 와인이 유명하다. 그리고 카프카스 지역엔 아름답고 높은 산들이 많다. 아리안이라고 하면 왠지 발음상 한민족의 대표 노래인 ‘아리랑’과 비슷해 왠지 우리 민족과도 친연성이 있게 느껴지는데, 국어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아리안족은 ‘백색 계통의 인도 유럽 종족으로서, 기원전 1500년 무렵에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나 이란에 이주한 고대 민족으로, 이란 인, 그리스 인, 로마 인, 게르만 인이 되어 현재 유럽 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카프카스는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교두보 역할을 하며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충돌하고 뒤섞이는 지역이 되어 왔는데, 인종적으로도 조지아는 코카시안, 아제르바이잔은 투르크계 그리고 아르메니아는 아리안으로 분류된다. 그래서인지 노아의 방주가 있다는 아라라트산을 민족의 영산으로 여기는 아르메니아는 유럽 정체성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신앙을 세계 최초로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가 되었고, 스스로를 노아의 직계 후손이라 여기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유태인의 피가 흐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대 아르메니아는 카톨릭 신앙이 주가 되는 유럽에 가까운 현재와는 달리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했던 이란에 더 가까웠다. 석유가 풍부한 라이벌 국가 아제르바이잔과 달리 코카서스 3국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아르메니아는 석재가 풍부해 이를 기반으로 현재 경제 개발에 힘쓰고 있는데, 수도인 예레반 시내를 화려하게 감싸는 조명들과 최고 명소로 손꼽히는 ‘카스케이드’는 아르메니아 정부가 최근 들어 얼마나 많이 관광객 유치에 공들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르메니아 역시 코로나에 이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했고, 전쟁을 피해 이주해 온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 때문에 코카서스 3국 중에서도 집세가 가장 많이 오른 지역이 되었다. 예전엔 하루 2만원이 체 되지 않았던 3성급 호텔 숙박비도 지금은 6만원 7만원 이상으로 호가하니, 나 같은 여행객 입장에서 정말 달갑지 않은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두 달 여전 러시아를 떠나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향했던 나는 비싼 월세 탓에 예레반에 오래 머무는 걸 포기하고 한나절만 그곳에서 체류한 이후에 루마니아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르메니아는 늘 나에게 측은함을 불러일으키는 연민의 땅이었기에, 너무도 짧았던 방문은 그래서 나로 하여금 더욱 더 미련을 갖게 만든다. 아름다운 아르메니아의 산하와 맛있는 현지 음식을 제대로 즐기며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나는 나중에 기회만 닿는다면 그곳에 좀 더 오래 머물며 불행한 역사의 질곡을 밟아온 이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을 좀 더 많이 알아가고 싶다.


https://youtu.be/bN9Yv3Nc1a0?si=vT-b5RUxhZ43juF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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