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만들어진 번영
내가 처음 ‘편력’이라는 단어에 꽂히게 된 건 발트유럽의 한자동맹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당시 나는 에스토니아의 교육 도시 타르투에서 석사 논문 주제 선정을 위해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국가 간 초국경 협력과 지역 협력에 대해 개인적인 연구를 진행중이었다. 독일어 발음과 우리 발음의 우연찮은 유사성 때문에 흔히들 중국 글자인 한자(漢子)로 착각하는데, ‘한자(Hansa)’는 중세 발트유럽의 교역 도시들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편력상인’을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러시아가 유독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달이 더뎠던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도시화가 뒤처졌기 때문인데, 도시는 한 나라의 번영을 상징하기도 한다. 중세 유럽의 ‘발틱(Baltic)한자동맹’은 대표적인 도시 네트웍이었고, 그 전통은 지금도 여전히 유럽에서 ‘도시동맹한자(City League The HANSE)’ 혹은 ‘새로운한자(new Hanse)’등으로 불리우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한자 동맹은 특히 작은 교역소들(trading stations)을 중심으로 상업 네트웍의 내부적 밀집도를 높여 끈끈하게 뭉쳤는데, 이러한 한자 동맹 지역에서의 교역의 밀집도는 상인들의 전문화와 동반됐다. 그래서 한자 네트웍은 상인들로 하여금 상업적 리스크를 줄이고 더 적은 비용으로 사업하는 것을 가능케 해 줬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에서 구두를 전문적으로 생산한다면 다른 지역에서는 의복만을 전문적으로 제작해 두 지역 간 불필요한 가격 경쟁을 줄이는 대신, 각각 직업적 전문성을 높여 제품의 질적 향상을 유도했던 것이다. 이때의 전통은 지금에까지 이어져 유럽 연합 안에서 ‘유러피언단일시장법(European single market law)’과 ‘전문화법(the law of specialization)’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두 번째로 한자 네트웍 안에는 ‘콘토어(kontor)’라고 불렸던 중앙 기관들이 있었다. 콘토어들은 한자 동맹 커뮤니티의 대내외적 안정과 안보에 기여했던 기관들이었다. 콘토어는 비공식적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허브였을 뿐 아니라, 한자동맹 안에서 규칙과 규정이라는 공식 체계를 지탱하기도 했다. 행위 주체를 소극적 객체로 여겼던 종래의 구조적 개념들과는 달리, 네트웍이론은 행위 주체를 어떠한 환경이나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로서 인식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콘토어의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of the kontor)는 ‘상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표현이자 결과’였다. 하지만 이 사실이 개별 상인들에서 도시들에 이르기까지 한자 동맹의 모든 행위 주체들이 단순히 경제적 목적만을 위해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개성들을 아주 빈번하게 보여주었다.
끝으로 한자 동맹의 중요한 특징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신뢰’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네트웍 이론과 신제도학파(new institutional economics(NIE))는 신뢰를 경제 행위의 중요한 변수로 본다. ‘신뢰는 행위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이끌어 냄으로써 사회적 복잡성을 감소시키고, 나아가 협력을 위한 조건들을 생성’해낸다. 신뢰는 사실상 이질적 국가와 문화 출신인 과거 한자 동맹 도시들 간 장거리 무역과 협력을 가능케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유럽 연합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근본적인 신조 중 하나이며, 역내 국가 간 평화와 안정 그리고 호혜를 가능케 만드는 정신적 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자 동맹은 지나친 규제 시스템, 거래 비용 상승 그리고 도시 간 불협 화음으로 인해 쇠퇴하고 말았다. 물론 그 이면엔 플랜더스, 프랑스, 러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초래된 군사적 긴장이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등 일부 지역이 외부 세계로의 문호를 닫은 것이 결국 한자 동맹 네트웍을 통한 협력적 교류, 교역 시스템의 종말을 야기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동맹은 유럽 역사에 있어 도시 발전과 계몽 시민의 등장을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중세 암흑기에서 근대 여명기로 가는 지경학점 전환점이자 디딤돌이었다. 근대화된 개인의 표상이었던 도시 상인들의 조합인 ‘길드’를 중심으로 상품별로 특화된 자치 도시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무역 네트웍이었던 한자 동맹은 한때 자체 법과 군대를 가질 정도로 번성하며 발트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북방무역을 독점하기도 했다. 이후 신항로발견과 유럽과 러시아 간 군사적 긴장 관계의 고조로 인해 급속히 쇠퇴했으나, 유럽단일시장법과 그에 이은 유럽연합의 등장 이후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호 번영 네트웍’이라는 중세 한자 동맹의 이상과 전통은 다시 부활해 현재 유럽 연합 경제와 교류 협력의 근간이 되고 있다.
https://youtu.be/c4u0h0XLFbM?si=7fuF5jYBmZt18Zb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