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VS신앙, 영성을 혁명하고 종교를 개혁하자

by 레테

‘축의 시대’ 란 용어는 철학자 칼 야스퍼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축의 시대’라고 하면,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조로아스터·예수·석가·공자·마호메트·소크라테스·플라톤 등의 철인들과 세계의 주요 종교·철학이 탄생한 인류 지성사의 가장 경이로운 시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영적 발전과 문화·문명을 일궈온 대부분의 주요 철학과 종교가 동시 다발적으로 출현했던 시기가 바로 이 축의 시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종교의 교리가 지금 시대에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는지는 냉철하게 점검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간 종교 간 대립과 반목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전쟁들을 목도해 왔고, 당장 지금만 보더라도 종교로 인한 분쟁과 대립은 전 세계와 전국 곳곳에서 여전히 첨예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당수의 종교인들은 진실된 참회나 회개라는 기본을 망각한 체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야욕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대부분 봉건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에 기반한 제도 안에서 원리주의와 교조주의에 세뇌당해 왔고, 순진한 민중들을 또 그렇게 현혹하며 가스라이팅하고 있다. 이들은 나아가 신의 대리인 혹은 성직자란 허울을 뒤집어 쓴 체 신앙과 수행의 순수한 목적을 도외시하면서 자신들의 종교를 거대한 권력을 지닌 이익집단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종교는 과거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여전히 일종의 그들만의 경제·운명 공동체로서 기업화 되고 이익 집단화 되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도래를 필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 인터넷의 발명은 그 간의 절대주의적 사고를 붕괴시켰고 지배층의 전유물이 되어 왔던 정보와 지식의 일반 공유를 가능케 했다. 그래서 민주화된 의식과 높아진 교육 수준을 지니게 된 대중들은 비판적 사고와 적극적 감시를 통해 부당한 권위에 대해 저항하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적 담론을 인용하자면, ‘이미 배운 것 혹은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재검토와 상대주의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세상이 보다 더 선진화·투명화·민주화 되어감에 따라 종교와 같은 권위적이고 교조적인 세계 인식과 사고의 틀은 현대에 들어 상당 부분 깨지거나 배척당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나 전통의 권위에 기댄 부조리하고 독선적인 망령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습관과 사고를 상당 부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경향은 나이가 많고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과 권위적이고 봉건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후진국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나는 모든 종교를 일방적으로 싸잡아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처음 종교가 만들어질 당시,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종교의 모태가 된 복음이 퍼졌던 박해와 고통의 시절, 그 절망의 시대에 너무나도 절박했던 시대적, 민중적 요구를 떠 올리며, 진정한 신앙과 수행의 회복을 통해 현실의 종교가 반드시 본래의 종교여야만 하는 진정한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할 뿐이다. 관료화·권력집단화·이익집단화 되어옴에 따라 부패하고 교만해진 종교인들의 영적 자정을 촉구하고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필연적 종교혁명이라는 또 다른 시대적 요구를 강력히 피력할 따름이다. 현재의 종교 단체를 이끄는 사람들이 천사의 얼굴로 위장한 악마가 아니라면 모든 종교가 원하는 이상은 동일할 것이다. 세상을 복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인간들에게 영적 안식을 주는 것. 무지 몽매한 영혼을 계몽시키고 진실된 참회와 회개를 통해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것. 그리고 인간이 삶의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해탈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잔인무도한 독재자들과 교활한 교조주의자들에 맞서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석가모니께서 화려한 궁궐의 삶을 뒤로 하고 헐벗은 민중과 고행의 삶 속으로 직접 들어가셨던 이유이다. 그 분들은 제도가 아닌 복음을 전파하셨다.

사실 우린 몇 천년 전부터 종교가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었지만, 제도화를 통해 권력적이 되고 세속적이 된 종교들이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세상의 혼란을 부추기며 온갖 갈등을 조장해 온 암울한 역사의 주범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종교라는 제도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제도 개혁을 통한 진실한 신앙의 회복은 바로 그런 과거와 현재에 대한 개인과 사회적 차원의 진심 어린 반성과 참회로부터 시작해서 고도로 복잡다단해진 지금의 현실에 맞는 종교의 모습을 새롭게 정립하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참된 신앙과 수행의 회복을 위한 새로운 종교개혁의 시작, 즉 영성(靈性)혁명이다.

우리가 믿는 정통 종교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불교·이슬람교 등의 시작은 권력의 차별과 압제에 맞선 평등사상과 자주의식의 발로였다. 이들은 소외된 민중의 종교였으며, 신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불의한 권력과 현실에 맞서 고통 받는 민중에게 현재에 대한 개혁,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영혼의 안식이라는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종교의 권위가 높아지고 조직이 비대해짐에 따라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소위 교역자들은 교만과 독선 그리고 아집의 늪에 빠져들었다. 종교적 신앙과 수행은 끊임없는 회개와 참회 그리고 자기 객관화를 통한 철저한 반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종교인들은 종교라는 제도의 본래 취지를 잃고 세속화와 폐쇄성이라는 두 개의 길을 동시에 걸어왔다. 종교가 거대한 사업체나 일반 기업과 다른 점 중에 하나는, 투명한 회계와 공개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투자를 받고 그 수익금을 투자자들에게 법적 규정에 기반해 환원하는 기업들과는 달리, 종교는 운영을 위한 자금을 헌금이나 기부금의 형태로 신도들에게 요구하며 이를 해당 종교에 대한 믿음이나 구원의 증거로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종교 집단의 회계 처리는 대체로 불투명하고 주먹구구식인 경우가 태반이다. 아울러 일반 기업은 회계 부정 행위 등에 대해 법적인 감시와 강제가 가능하지만, 종교는 상대적으로 위법 행위 등에 대해 그 자체가 지닌 폐쇄적 특성상 즉각적인 적발이 어렵고, 법 집행에 있어서도 종교 탄압으로 비춰질 여지가 있어 상식적 정치나 원활한 행정이 힘든 게 현실이다. 인사 절차에 있어서도 종교는 해당 분야에 대한 현장 경험이나 전문성에 기반해 인력을 배치하고 권한을 부여하기보다 실무 능력이나 전문성이 떨어지는 교역자들을 책임 있는 자리에 우선 배치함으로써 공정하고 효율적인 인사행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미 내재하고 있는 폐쇄성을 더욱 강화시키고 조직 운영의 투명성을 훼손해 집단적인 부정과 부조리 그리고 무능을 양산하는 온상이 된다. 물론 종교는 다양한 문화·교육 활동과 자선 사업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바도 크지만, 이는 일반 기업들이나 단체들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세금을 내지 않는 종교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내는 기업들이 자선 사업이나 문화 사업 등을 더 많이 지원하고 있을 것이다. 종교는 이마저도 사실상 포교 목적으로 하는 거지만, 기업은 기업 이미지 홍보 차원에서 혹은 사회적 책무 차원에서 소외 계층과 문화를 지원하고 심지어 종교에도 기부한다.

기실 세속화되고 이익집단화 된 종교의 가장 큰 문제는 종교지상주의와 교조주의인데, 중국의 ‘중화사상’, 북한의 ‘주체사상’처럼 이들은 독선과 아집으로 내외부의 건전한 비판에 대해 눈과 귀를 닫고 자신들의 도그마에 집착하면서 억지 논리 혹은 무논리로 스스로를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하고 절대화시킨다. 이와 같은 폐쇄성과 세속성, 봉건적 인습과 권위주의적 사고 그리고 소통 없는 일방적 교조주의는 그래서 종교 스스로가 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할 해악이며, 종교의 발전을 저해하고 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종교 인구를 감소시키는 주된 요인이다. 전문직 성범죄자 중 1위가 종교인이고, 시민들이 가장 불신하는 사회 집단에 정치와 더불어 종교가 항상 수위권에 든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이제 더 이상 돈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을 좇아 높은 데로 임하려 하지 말고, 본래의 가르침을 받들어 소수와 약자를 향해 낮은 데로 임하려는 자세를 스스로 견지해야 한다. 더불어 종교의 자유는 인정하되, 종교인들이나 종교 단체에 대한 혜택을 축소하고, 종교 기관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강화하는 행정적 노력 역시 현실적으로 병행되어야 제대로 된 개혁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교단 내외부의 자성과 변화를 통해서만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이비 혹은 교조주의라는 오명을 벗어 던지고 진정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종교 개혁의 시작은 종교인들 스스로의 자정 노력 그리고 시민과 사회의 감시로부터 비롯됨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영성(靈性)혁명이란 그래서 진실된 회개와 참회에 바탕해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깃든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는 것을 시작으로, 종교인들과 일반인들이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총체적 의식 개혁 운동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지를 깨치고 현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우선적으로 길러야 한다. 즉 각성이 필요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라고 본다. 꾸준히 다양한 뉴스를 챙겨 보고 일주일에 한 권 이상의 양서를 읽는다면, 폭넓은 정보와 지식 습득은 물론 정서 함양과 교양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 명상과 운동 그리고 직업 및 취미 활동 등 다양한 사회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넓고 깊게 보고, 사람과 사건을 균형 있게 판단, 분별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자신의 영성을 안다는 것은 그래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허상에 가리워진 진실과 오염된 영혼을 바로 보는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다. 과거 인간 같지 않은 것들에 맞서 자아를 희생했던 위대한 영혼들처럼, 불의 앞에 모든 두려움이 제거된 상태에서 그리고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라는 우주적 섭리 안에서 오로지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선의지를 고양하며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성 혁명의 요지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자비, 예수님의 사랑 혹은 다른 뭐가 됐든 상관이 없다. 그러한 가르침을 빙자해서 권력이나 권위에 기대 이기적 야욕을 채우려는 집단이 있다면, 우리는 과감히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래서 마음이 개안(開眼)한 신인류, 의식이 각성된 집단 지혜가 주도적으로 영성혁명을 이끌어야 한다.

정신분석학자인 융은 인간의 정신이 자신의 특별한 능력과 개성을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와 세계 그리고 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때, 자아를 초월하여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선천적 경향성인 ‘개성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아 초월’이란 용어를 직접 제안하고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매슬로에 따르면, 영성은 어떤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가정을 반드시 세우지 않아도 되는 자연주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캔 윌버 역시 전개인(prepersonal), 개인(personal), 초개인(transpersonal)으로 인간의 발달 단계 모델을 제시한 바 있는데, 영성 혁명의 목표는 바로 우리 인간 각자가 자아를 초월하여 자기를 실현한 초개인이 되는 데 있다. 정리하자면, 영성 혁명의 핵심은 바로 자아인 ‘나’가 아니라 ‘나’속에 들어 있는 ‘연결된 의식의 원형’으로서 각자의 ‘자기’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선 ‘자아’에 묶인 의식이 우주 의식으로 나아가는 길로서 사랑을 밝히셨고, 불교에선 합일 의식과 이성적 의식을 초월하는 ‘보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힌두교가 ‘자기’의 가장 높은 측면인 ‘아트만’을 가정하는 것 등이 다 이런 믿음에 대한 선지자들의 오래된 지혜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각성은 연결된 의식들과의 유·무형의 끝없는 교류와 조화로운 융합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고 완전해질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이 아닌 국가와 민족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우리는 그 동안 대한민국이 단일 민족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왔고 그렇게 교육 받아왔다. 하지만 조금만 상식이 있어도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허구인지를 알 수 있다. 인류는 고래(古來)로부터 교통과 통신을 통해 끊임없이 교류하고 교역해 왔다. 한민족만 해도 이미 고대부터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거주했던 토착 민족과 외부로부터 유입해 온 외래 민족 간 끊임없는 충돌과 융합을 통해 문명을 일구고 국가를 설립해 왔으며 지금의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단일 민족주의는 국가 체제를 강조하기 위해 정권이 가공한 어젠다일 뿐, 한민족이 단일 민족이란 주장은 사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견지하는 종교적 선민사상, 나찌의 아리안주의, 중국의 중화사상 등과 같은 민족 우월주의와 인종 순혈주의의 망상은 허위로 가득 찬 정치적·종교적 아젠다일 뿐, 이런 종류의 망상은 인류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사고 중에 하나다.

과거 역사를 한번 돌아보자. 그럼 우리는 세상을 지옥 같은 고통에 빠트리며 수많은 폭력과 전쟁을 일으켰던 우생주의의 망령들을 수도 없이 찾아 볼 수 있다. 그건 종교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이 옳고 자신의 교리만이 완전하다고 믿는 한, 종교는 더 이상 진정한 신앙이 아니며 종교라는 대리체, 교역자라는 대리자를 통한 구원은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인식과 사고의 전환을 통한 영성 혁명은 그래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불편부당함과 열린 마음, 벽 없이 모든 곳으로 사통팔달 통하는 생각과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을 갖는 게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직적이고 권위적인 사고, 독선과 아집, 절대주의와 교조주의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과 더불어 살며 자신과 사람들이 무지를 깨치고 주체적으로 각성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이다. 건전하고 건설적인 비판이 없는 맹신은 인간의 사고를 착각과 오류에 빠트리고 영혼을 병들게 만들 뿐이다. 나아가 비판적 이성은 반드시 합리성과 객관성 그리고 인류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새도 맞바람이 불어 줘야 공중에 뜰 수 있듯이, 건강한 저항과 경쟁은 상생 발전의 원동력이다. 그래야 하늘에 뜰 수 있고 맞바람과 밀바람을 동력 삼아 스스로 날 수 있는 것이다. 막힘없이 트인 마음은 경계 간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자유롭고 창조적인 생각은 사회와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어 역동적인 생명 에너지를 생성해 낸다. 반면에 권위적이고 경직된 사고나 환경, 엄숙주의는 천재도 바보로 만들고, 부조리와 적폐의 온상이 된다. 종교도 그래서 이젠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 인구가 급감하는 지금의 추세를 넘어 앞으로 미래엔 종교라는 제도 자체의 존립 이유가 사라질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종교는 권력의 편에서 이익 집단화, 정치 집단화 되어가는 길에서 벗어나 낮은 곳으로 임하려는 노력에 더 집중해야 할 것이다. 영성 혁명을 통해 신앙을 회복하고 종교를 개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천주교·개신교·정교로 구성되는 기독교는 과거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는 형식과 겉치레에 치우치며 부패해 버린 교회와 성직자들을 단죄하고, 바리새적 율법생활에서 벗어나 참회와 겸허라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물론 지금의 개신교는 과거와 같이 부패하고 세속화된 측면이 많지만, 과거의 종교개혁은 서구 세계에서 종교 스스로가 자정을 실천하고 변화를 도모했던 의미 있는 시도였으며, 인간을 무지에서 해방시킨 계몽사상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끈 시민 혁명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안타까운 점은 불교·이슬람교·힌두교·유교 등 다양한 종교가 폭넓게 퍼진 동양권에선 종교가 국가 전체의 문화를 지배하고, 종교인들이 최고 권력층과 엘리트로 군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종교 개혁의 역사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더욱 뿌리가 깊어진 권위적이고 봉건적인 문화 그리고 폐쇄성은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이들 종교의 영향력이 강한 아시아 및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영성혁명은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더 시급한 인류의 생존 과제가 되고 있다. 즉, 종교 개혁과 영성 혁명은 총체적으로 병들어 버린 우리 생명의 진정한 재생과 부활을 위한 유일하고도 필수적인 선택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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