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라이제이션(Idolization), 소위 우상화는 정치와 종교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대중의 인기와 충성심에 기대는 정치와 종교의 특성 상 우상화는 때론 필요악이기도 하다. 우상화는 특히 쇼비즈니스가 발전함에 따라, 연예계 등 대중문화계에서도 일종의 과열된 형태의 팬덤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물론 건전한 팬덤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스타와 팬들이 건전하게 소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것은 우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성과 상식의 기반에서 발아하는 감동이고 시너지다. 하지만 이해 관계에 의해 가공되거나 감정에만 치우친 팬덤은 해당 스타를 신격화하거나 절대화해서 외부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비판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공격은 물론 언어적·물리적 폭력 등을 서슴지 않게 하는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는 특정 정파나 사이비 종파의 극단주의적 행태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데, 정치와 종교는 이미 제도화되고 집단화된 권력이라는 점에서 이성과 상식을 상실한 과열된 팬덤, 즉 우상화의 위험성은 훨씬 더 배가된다.
그런데 평범하고 정상적이었던 사람들이 우상화에 빠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우상화는 자신이 사랑이나 존중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에서 오는 소외감, 자신이 지닌 사랑의 욕구를 투사할 적절한 대상을 주변 현실에서 찾지 못한데서 오는 실망감, 자신의 가치나 존재 이유 등을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라고 느끼는 데서 오는 열등감이나 불안감 등에서 기인하는 정서적 결핍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 권위주의적인 문화나 지나친 엄숙주의에서 비롯되는 언어적·물리적·구조적·문화적 폭력 등 다양한 형태의 학대나 차별에서 오는 자존감의 결여와 현실도피 성향 그리고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추구 등도 평범한 사람들이 우상화에 빠지게 되는 주된 원인이다. 따라서 우상화의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사회적인 차원에서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개선하고, 모든 형태의 차별과 불평등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려는 우리 각자의 노력이 중요하다. 나아가 건전한 상식과 따뜻한 감성을 지닌 계몽적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생활밀착형 교육과 대책을 강화할 필요도 있다. 예를 들면, 명상과 운동, 독서와 신문 읽기, 답사 여행, 다양한 교양 문화·레저·스포츠 활동, 산책, 환경보호와 자연친화적인 생활, 설교나 훈계가 아닌 공감과 대화 등을 장려하는 것 등이 이를 위한 적절한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 스스로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주체성을 확립하고, 내부의 끊임 없는 자정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정치·종교가 건강해지고 건전한 팬덤 문화가 정착되기 위해선 어떠한 형태의 우상화도 있어선 안 된다. 특정 개인이 아닌 우리, 바로 우리들 하나하나가 주인이고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시민들과 정의로운 소외의 연대는 바로 우리 각자가 겸허한 참회를 바탕으로, 우리의 잠재된 의식을 각성해 각자가 자신의 삶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주인이 되자는 것이다. 그리고 평등하고 본분을 다하며 서로를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현재와 미래를 위해 사회를 함께 이끌어 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생활민주주의의 구현이다. 생활민주주의는 우리들 문화와 일상생활 속에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서열과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주의,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체제, 상명하달식의 군사 문화 등이 생활민주주의에 반하는 상부구조라면, 청사나 관공서 등을 지나치게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경향, 지나친 존대말 사용과 서열을 구분 짓는 과다한 명칭들, 무릎 꿇기, 고개 숙이기, 상석 구분하기, 아랫사람이나 약자에게 버럭 소리 지르는 행위, 몰리적 정서적 폭력 등은 우리들 생활 속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반민주적이고 봉건적이며 권위적인 인습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름다운 전통은 보존하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인습에 대해선 과감한 개선의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지나치게 많고 복잡한 존대말을 줄일 필요가 있다. 말과 호칭이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하기 때문이다. 말과 호칭이 복종을 강요하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소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말과 호칭이 영혼의 자유를 얽어매는 엄숙주의를 야기하고 권위주의적 문화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는 좀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더 당당해져야 한다.
서열이나 권위가 아닌 인권이 중심이 되는 생활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또한 필요한 것은 직접민주주의의 도입과 정치 선진화이다. 시민들 각자가 우선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다양한 정치 행위에 참여하고 연대하는 것은 직접민주의를 가능케 하는 시발점이다. 기득권 권력을 끊임없이 감시·견제하고, 동시에 소수의 목소리와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 및 시민 단체에 대한 국가적·사회적·기업적 차원의 지원 역시 강화해야 한다. 환경운동과 반전운동을 폭넓게 전개하고, 성과 젠더(여성, 남성, LGBTQ 등)·나이·지역·학벌 등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단순 차별과 성적·언어적·물리적·감정적·구조적 폭력 등 모든 형태의 폭력행위에 반대하고 이를 예방해야 한다.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그늘과 소외된 이웃을 살피며 봉사활동과 기부를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정치는 더 이상 통치(Government)가 아닌 협치(Governance)가 될 것이며, 종교는 더 이상 이익집단이 아닌 본원적 신앙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활민주주의 즉, 넓은 의미의 정치이며 직접민주주의와 정치 선진화의 시작이다.
경제적으로 생활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경제 정의의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세금과 관련해 우리는 심각한 문제의식을 지녀야 한다. 내가 내는 세금이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는 알아야 하며, 서민들의 납세 부담이 과해지는 건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는 신호임을 늘 경계해야 한다. 특히, 증세 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혈세로 먹고 사는 위정자와 공무원들이 국민의 고통을 체감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공공기관이나 공기업 등이 세금을 얼마나 효율적이고 투명하게 쓰는 지를 부단하게 감시하고, 감세 및 불필요한 경비 지출에 대한 개선과 삭감을 통해 방만한 공적 소비를 줄이고 민간 경기를 활성화시켜 기업 활동과 자영업을 장려하는 것이 경제 숨통을 틔워주는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공무원 수 감축과 관료체제 개선을 통한 규제 일변도의 경제 시스템을 혁파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나아가 건전하고 공정하며 자유로운 민간 경제 활동을 보장하고 장려하는 동시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불법 투기나 사기 같은 반사회적, 반인륜적 경제 행위나 탈세·담합 등 불법적이고 불공정한 경제행위에 대해선 종전보다 백 배 이상 강력한 처벌과 규제가 가해져야 한다. 한국은 사기에 대한 처벌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 나는 솔직히 그 이유를 모르겠다. 기업은 물론 재벌을 비롯한 부유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현을 위해 이들의 사회봉사와 투명한 기부 행위를 적극 장려해야 하며, 기업은 개인의 재산이 아닌 사회의 공동 자산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공정한 경쟁과 자유로운 경제 행위를 통해 부가 축적되고 투명한 분배 시스템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가 민생 구석 구석에 고루 분배될 때 시민들의 교양 함양과 학습 활동 그리고 삶의 질 향상과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보다 용이해진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정치나 종교가 자본과 결탁해 권력화되고 사유화되는 것을 막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올바른 정치와 종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생활민주주의가 정치·경제·문화 등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볼테르의 ‘건전한 회의주의와 개인의 창의성,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대전제가 우리들 의식 속에 명확히 자리 잡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나아가 각각이 깬 사람·자기 실현을 이룬 사람·유목적 정신체계를 갖춘 사람·비판적 수용자·독립적 창작자 등이 되어 통치가 아닌 협치를 구현하고 율법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신앙과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 정치와 종교의 제대로 된 발전과 진화를 주도적인 시민의 힘으로 이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