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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티제 Jul 30. 2023

비(悲)가 오는 날은 베란다 청소하는 날

반나절 한증막 같은 베란다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나서야 알게 된 이유

뜬금없는 베란다 대청소가 시작된 건 베란다에 보관해 둔 양파를 가지러 들어가서였다. 초파리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있었다. 여름이면 징글징글한 단골손님. 쓰레기봉투 속 내 딴에는 밀폐한다고 꽁꽁 비닐에 싸 넣어 둔 자두 씨가 원인인 것 같았다. 마침 베란다 물청소 할 때가 됐는데, 운동을 다녀온 직후라 이미 온몸이 땀에 뻘뻘 젖어 있기도 했고, 이참에 잘 됐다 싶어 베란다 청소를 하기로 했다. 


   먼저 화근이 된 쓰레기봉투부터 치우기로 했다. 집 안의 쓰레기통들을 탈탈 털어 반쯤 채워져 있던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가득히 채운 뒤 공기 하나 새어 나오지 못하게 입구를 꽁꽁 묶어 현관에 내놓았다. 벌써 속이 시원한 느낌. 베란다 바닥에 물을 뿌리려고 보니 베란다 바닥에는 아직 운송장과 테이프들도 미처 뜯어내지 못한 택배 박스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분리수거부터 해야겠다 싶었다. 분리수거 가방들이 걸려있는 행거 위로 바닥에 늘어져 있던 박스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올렸다. 웬 박스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일회용품 사용하지 않겠다고 그렇게나 노력을 하는데 택배 박스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걸까. 


   박스 정리가 끝나니 그 옆에 얼마 전부터 시름시름 앓고 있는 화분이 눈에 밟혔다. 친구가 집에 놀러 올 때 선물로 들고 왔던 작은 화분이었다. 마침 남은 흙들도 있겠다, 내친김에 화분갈이를 하기로 했다. 분리수거함에서 큰 비닐을 한 장 꺼내 와 바닥에 펴고 시들시들한 생명체를 구출해 내기 시작했다. 물을 많이 줘서, 혹은 물을 덜 줘서 시름시름한 줄 알았는데 뿌리를 꺼내려고 보니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뿌리를 감당하기에 화분이 너무 작았던 것을 알게 됐다. 뿌리가 잘 빠지지가 않아 어쩔 수 없이 잔뿌리를 모두 구출하지 못한 채로 큰 줄기만 어찌어찌 빼냈다. 집에 쌓아둔 빈 화분들 중 적당히 큰 화분을 하나 가져왔다. 흙을 채우고 뿌리를 조심조심 심었다. 영양제도 하나 꼽아줬다. 이제 조금 넓어진 공간에서 마음껏 숨 쉬며 자라주기를.


   베란다의 반대편 공간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놓여 있고 천장과 바닥에는 건조대가 거치되어 있다. 건조기 위에 마구잡이로 쌓여있는 세제와 청소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땀 흘린 김에 조금만 더 손을 보기로 했다. 세제들과 어디서 받아왔는지 모를 청소용품들이 뒤섞인 커다란 보냉백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냉백 속에는 건조기에 넣어 사용하는 먼지 거름망이 있었다. 여분으로 하나 더 받아뒀다고는 들었는데 여기 있었구나. 거름망에 쌓인 먼지를 떼어내고 헹궈주었다. 거름망이 눈에 들어온 김에 같은 결의 아이들도 씻겨주기로 했다. 건조기와 세탁기 속 먼지 거름망을 꺼냈다. 건조기 거름망은 매번 비워준다 치고, 세탁기 거름망은 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반 이상이 차 있었다. 거름망을 빼낸 김에 세탁기 통세척도 한 번 해줘야지, 베이킹소다를 풀어 통세척 기능을 작동시켰다. 집안에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 줄 몰랐다. 대부분 결혼 전에는 엄마가, 결혼 후에는 남편이 알음알음 맡아서 챙겨 왔을 일들이었을 것이다. 아, 이제 정말 물을 뿌릴 준비가 되었다.

 

   날도 덥고 몸에 땀도 범벅인데 시원한 물을 대야에 받기 시작하니 벌써부터 시원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을 여러 번 받아 베란다 가장자리부터 물을 붓고 바닥을 쓸어내는 청소도구로 바닥의 잔여물들을 한 데로 모으기 시작했다. 여러 번 그렇게 물을 뿌려대니 기분이 좋았다. 호스를 인터넷으로 주문했었는데 연결 부위 부품이 맞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어 요즘은 수동으로 물을 뿌리고 있다. 이것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호스는 하나 다시 사야겠다. 베란다 바닥이 드디어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여러 번 차가운 물을 베란다 바닥에 뿌리며 발에 닿는 차가운 물의 온도에 뻘뻘 흘린 땀이 시원하게 식어갔다. 사우나를 하고 나와 식혜를 먹는 것 마냥 기분이 상쾌해졌다. 드디어 베란다 청소가 끝났다. 드디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시원하게 샤워하고 쉬어야지 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점심때 먹은 커피 때문인가,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가야 하는데 갑자기 주방도 헤집고 싶어졌다. 각성효과가 분명했다. 나도 모르게 내 손은 싱크대 찬장과 서랍을 열고 있었다.


   그때였다. 애꿎은 베란다와 주방을 먼지 털듯 탈탈 털고 있는 이유. 그 이유는 단지 베란다에 초파리가 날아다녀서가 아니었다. 지난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지난 며칠 간, 나는 진심을 담아 어떤 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정성으로 준비하고 그 결과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일의 민낯을 알게 된 어제의 사건으로 인해 나도 모르는 새 적잖이 실망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렇지 않지 않았나 보다. 바보같이 반나절 한증막 같은 베란다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다니. 그냥 흘려보내려고 했던, 흘려보낸 줄만 알았던 그 일이 흘려보내지지 않고 내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때, 아, 청소하기 잘했다 싶었다. 신경쓰이는 초파리들은 다 사라졌고 성가신 택배 박스들도 모두 해치웠다. 죽어가던 식물도 살려냈고 먼지 쌓인 곳곳을 시원하게 털어냈다. 그리고 시원하게 물을 뿌렸다. 그럼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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