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핸드백 공장 딸의 이야기
아빠는 핸드백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방을 만드셨으니 거진 40년 경력의 장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공장은 나의 놀이터였다. 일하시는 부모님 곁에 안전하게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공장 삼촌 이모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으며 자랐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일터였던 그곳은 적어도 나에겐 즐거운 곳이었을 것이다. 미싱 작업과 조립 작업을 하는 작업자들 사이에서 버려지는 가죽이나 종이들은 어린 내겐 미술시간 같은 놀잇거리였다. 수십 수백 장이 연이어 봉제되어 나오는 보들보들한 핸드백 안감들 사이의 실을 작은 쪽가위로 자르는 ‘실밥 따기’ 같은 일들이나 자재들끼리 서로 붙이기 위해 일차적으로 사이사이에 붙여주는 ‘양면테이프’를 붙이는 일들은 별다른 기술이 없어도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는 일들 이어서 가끔 나도 일을 하겠다고 덤비곤 했다. 공장 안은 늘 핸드백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재들과 가방들로 가득했다. 공정 초기 단계에서는 수백 수천여 개의 핸드백을 만들기 위한 부자재들이 가득 쌓여있었고 마무리 단계에서는 예쁘게 완성된 가죽 핸드백들과 포장재들이 완벽히 납품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나는 핸드백에 파묻혀 자랐다.
중학교 졸업식 날 집에 불이 났다. 밖에 놓여 있던 대부분의 물건들이 탔다. 불이 꺼지고 옷가지라도 챙겨 나올까 싶어 현관으로 들어가니 신발장 위에 그 며칠 전 사놓은 하얀 가방과 하얀 운동화가 검은 비닐의 형체로 녹아있었다. 그다음 날인가, 아빠는 학원에 가야 하는 나에게 문제집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검은색 가죽 숄더백을 건네주셨다. 아빠는 내가 당장 문제집을 넣어 가지고 갈 가방이 없을까 봐 가방부터 만드셨던 것이었다. 조금은 투박해 보이지만 큰 문제집 대여섯 권쯤은 넉넉히 넣을 수 있을 튼튼한 가방. 그 가방은 학생들이 메고 다니는 책가방보다는 직장인들이 서류를 넣어 들고 다니는 업무용 가방에 가까운 디자인이었다. 그 당시 아빠가 제일 잘 만들 수 있었을 디자인이었겠지. 그 가방을 들고 학원으로 향하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모서리가 닳고 먼지가 쌓여도 한동안 그 가방을 버리지 못했다.
10대가 되고 20대가 되며 공장에서 노는(?) 일은 점점 뜸해졌다. 가끔 일손이 너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면 내가 할 수 있는 쉬운 일거리들을 대차게 도맡으러 출근 도장을 찍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더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내가 공장에서 일손을 돕는 일보다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점점 그곳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내 기억으로는 9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 핸드백을 만드는 공장들은 더 낮은 인건비로 핸드백을 제조할 수 있는 나라들로 이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중국으로, 베트남으로.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렇게나 호황이었다는 한국의 제조업 시장이 점차 힘겨워지고 있었다. 아빠의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도 그 공장들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공장 직원들의 국적이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어린 나의 시선에도 치솟는 물가에 비해 인건비의 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거래 조건은 점점 열악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빠도 더 오랜 시간 일했고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날이 더 늘어만 가는 것 같았다. 공장을 건강하게 운영하기에 인건비는 터무니없이 낮아 보였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과는 상관없이 핸드백은 여전히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백화점에 화려하게 진열되어 있는 핸드백을 보면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동대문 도매시장에 헐값으로 판매되고 있는 핸드백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비싸면 비싼 대로 싸면 싼 대로 화가 났다. 핸드백이라는 것은 나에게 그런 것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월급을 받고 보너스가 나와도, 제대로 차려입고 갈 곳이 생겨도, 절대로 비싼 핸드백을 사지 않았다. 명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물건이 많이 팔려야 주문이 들어오고 일거리가 생길 텐데, 결국 나같이 모두들 핸드백을 사지 않으면 공장들이 더 힘들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 친구가 그때까지 내가 보아 온 수많은 핸드백 중에 그야말로 가장 예쁜 핸드백을 메고 왔다. 세련된 디자인과 영롱한 색감, 빈틈없는 마감의 핸드백을 메고 있는 친구에게 가방 예쁘다고, 어디서 샀냐고, 나도 하나 사야겠다고 칭찬을 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친구는 나도 이런 가방 집에 있는데 하며 별거 아니란 식으로 말했다. 그때 그 핸드백을 메고 있던 친구는 귓속말로 나에게 그 핸드백의 브랜드와 가격을 수줍게 말해줬다. 내가 그 가방의 가치를 알아봐 준 것에 대해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뭔가 가치를 알아본 것 같아 나대로 기분이 좋았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사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게 핸드백인지라 나도 모르게 보는 눈이 생긴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명품이라는 게 나의 어떠한 신념과 충돌하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가격과 품질은 어느 정도 비례할 수밖에 없다. 핸드백도 마찬가지다. 1만 원짜리 시장 핸드백과 100만 원짜리 백화점 핸드백은 확실히 다르다. 소재나 디자인, 마감도 확실히 티가 난다. 하지만 일정 품질 이상의 핸드백들의 가격이 천차만별인 경우는 브랜드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내 취향의 완벽한 핸드백은 30만 원짜리가 될 수도, 300만 원짜리가 될 수도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명품을 제외하고 품질이 동일한데도 가격 차이가 발생하는 경우라 하면 'made in Korea' 이냐 아니냐의 정도라고 해야 할까. 같은 품질의 가방이라도 인건비가 더 비싼 한국 내에서 만들었느냐 혹은 인건비가 비교적 저렴한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 들어왔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가방을 만들어 들여오는 게 아닐까. 인건비가 곧 기술의 차이라 치환한다면 인건비도 품질에 영향을 주는 요소일 수 있겠지만 핸드백의 경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한국 제조업이 힘들어진 거니까.
드디어 제목으로 돌아왔다. 삼십 대 후반이 되니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고를 때 어떤 핸드백을 들고 갈지 고르기가 어려워졌다. 보통은 책이 몇 권은 들어가는 가벼운 쇼퍼백을 들고 다니고 큼직한 캔버스 재질의 백팩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정장을 입고 가는 결혼식에 그런 가방을 들고 가긴 어색하다. 얌전한 핸드백이 한두 개 있기는 하지만 왠지 뭔가 부족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도 나이를 먹은 걸까. 결혼식에 입고 갈 옷과 가방을 고를 때면 왠지 명품 가방쯤은 하나 있어야 어울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TPO라는 게 있는 거니까 나도 하나 사 볼까 싶은 마음에 내 취향의 명품 브랜드 SNS를 팔로우하고 마음에 드는 모델도 발견했다. 친구들을 따라 못 이기는 척 한번 메어보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아직은 그 핸드백을 사진 못할 것 같다. 아직은 아빠의 손길이 닿은 핸드백이 더 마음이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