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거 내가 김치 한 번 담가볼게.

엄마는 언제부터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을까.

by 따티제

ㅡ엄마, 이거 내가 김치 한 번 담가볼게.


말을 내뱉자마자 빛의 속도로 후회가 몰려왔다. 올해부터 시골살이를 시작한 삼촌이 박스 한가득 채워 보낸 갓 더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원래 같으면 꿈에도 시도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에게 김치를 담그게 할 수는 없었다. 갓 상태가 별로면 그냥 버려버리자는 나의 말에 엄마가 흔쾌히 동의했다. 몇 번이고 갓을 뒤적이던 엄마는 삼촌이 갓 농사를 너무 잘 지었단다. 빼박이다. 아, 하필 왜 이 시점에 갓을 보내서는.




호기롭게 갓을 맡아보겠다는 나를 두고 엄마는 연신 걱정투성이였다. 네가 할 수 있겠어? 집에 마늘은 있어? 고추도 좀 가져갈래? 다라는 있어? 그럼, 레시피 찾아보면서 한 번 해봐. 갓 상태가 너무 좋아. 그렇게 갓 더미에 마늘 한 봉지, 고추 한 봉지가 차에 실렸다. 앞으론 버둥거리는 율이를 아기띠로 안고 뒤론 율이 물건이 담긴 배낭을 메고 한 손엔 다라를 담은 검은 봉지까지 들렸다. 아, 망했다.




갓을 가져온 지 나흘이 되어서야 현관 밖에 방치되어 있던 박스가 열렸다. 더 이상 내버려두면 갓이 다 시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따라 자기 전 유난히 울어대는 율이를 겨우 잠재우고는 현관 앞에 신문지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율이를 재우느라 전구색 등만 희미하게 켜 놓은 복도의 끝에서 야심 차게 갓 다듬기가 시작됐다. 엄마가 김장할 때 갓 다듬기를 도왔던 어렴풋한 기억에 의지한 채 노랗게 시든 잎을 솎아 내고 갓 머리를 다듬어 대야에 차곡히 쌓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갓을 한 뿌리 한 뿌리 다듬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살림을 시작한 지도 꽤 됐고 이젠 엄마가 되었는데도 김치 한 번 혼자 제대로 담가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언제부터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일찍이었겠지.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떠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까. 그때는 김치를 파는 곳이 없었나. 나처럼 어느 날 문득 배추가 가득 담긴 박스를 떠안게 되면서부터였을까. 그 때 엄마 마음은 어땠을까.




엄마가 김장하던 날이면 늘 우리 집은 잔칫날 같았다. 친척들이 손을 보태러 모여들고 맛있는 보쌈 냄새가 집 안을 가득 메웠다. 나와 동생은 덩달아 신이 나 심부름을 자처하고는 나름대로 열심히 김장을 도왔다. 허리가 아프고 힘들기는 했지만, 누구 하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들. 올해는 엄마의 회복을 위해 김장은 절대 하지 말자고 했다.




한참 갓을 다듬다 보니 흙냄새가 은은히 집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시골 할머니 집 주변을 가득히 둘러싼 밭에서 나던 그 냄새. 작년에 율이를 임신하고서 내내 누워있던 탓에 갑자기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었는데. 할머니 집에 가서 포대 가득히 완두콩을 따 와서는 거실에 펼쳐놓고 할머니랑 엄마랑 같이 온종일 콩을 발라내던 그날에도 이런 냄새가 났었는데. 그때 함께 찍었던 셀카 속 할머니는 브이를 하고는 활짝 웃고 계시는데. 율이 돌이 지나면 꼭 한 번 내려가 봐야지.




삼촌은 그래서 시골에 아주 내려간 걸까. 흙냄새를 맡으면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서. 평생을 밭에서 딴 채소들을 연신 채워 서울로 올려보내던 할머니를 대신해 삼촌은 앞으로 계속 우리에게 흙냄새를 채워 보낼 작정일까. 올해만 해도 벌써 몇 번이나 박스를 올려보낸 삼촌. 이런저런 이유로 내심 오래도록 얄미워했던 삼촌이 갑자기 가엾어졌다.




막막히 칼자루를 쥐고 지루하게 갓을 다듬기 시작했던 나의 마음은 어느새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 둥둥 떠 있는 통통배처럼 막연히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다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던 걸까. 아직 내 옷장엔 후드티와 청바지들만 잔뜩 걸려있는데. 아직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같은데. 아무것도 자신이 없는데. 물김치 하나도 제대로 못 담그겠는데 말이다.




갓을 한 시간이 넘도록 다듬고 나니 솎아 낸 시든 잎이 반, 살려 낸 갓이 반이다. 엄마가 다듬었으면 이렇진 않았겠지. 찍어서 엄마한테 보여줘야겠다. 어떤지 알려주면 다음번엔 더 잘 다듬어 볼게. 아, 그리고 다음번엔 나 더 즐겁게 다듬을 수 있을 것 같아.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갓을 절이고 물김치에 함께 들어갈 채소를 다듬을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바쁘다. 일단 솎아 낸 이파리들을 일반 쓰레기로 버려도 되나 검색부터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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