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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티제 Feb 15. 2024

타인의 온도

어쩌면 시간만이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있겠지

1.

그와 나란히 앉아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싸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조용히 고개를 돌려본다. 열이면 열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는다. 그가 눈물이 많은 건 맞다. 그는 F고 나는 T인 것도 맞다.


2.

ㅡ울어? … 왜 우는지 물어봐도 돼?

그가 왜 우는지 궁금해 그야말로 T처럼 던지는 질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엄두도 못 내는 질문이다. 나는 그가 왜 슬픈지, 어떤 과거의 기억이 그를 슬프게 했는지 궁금하다. 그는 어떤 코드에 반응하는지, 왜 나는 그와 함께 울지 못하는지 궁금하다. 몇 번 그런 질문을 던지다 보니 그에게 묻는 날보다 함께 슬퍼하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다.


3.

꼭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는 눈물 한 방울 맺히지 않은 건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렇다. 그냥 우리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눈물이 날 뿐이다. T니 F니 그런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울지 않는 사람이 우는 사람을 달래주면 될 뿐이다.


4.

동생과 함께 엄마 생신 케이크를 사러 갔다. 아르바이트생의 말투가 영 싸가지인게 싸우자는 것 같다. 내가 한마디 하면 앞치마를 던지고 때려치울 태세다. 나한테 화가 난 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불똥은 나에게 튀고 있음이 분명했다. 좋은 일로 케이크를 사러 갔는데 화를 내고 나올 수는 없어 머리끝까지 화를 꾹꾹 누른 상태로 가게 문을 나섰다.


5.

남동생이 옆에서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다. 열받아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큰 건널목을 한참이나 기다려 건너고 나서야 동생에게 한마디 건넸다.

ㅡ나 지금 저 아르바이트생 때문에 너무 짜증 나.

ㅡ누나. 그런데 나는 저 아르바이트생이 불쌍해.


6.

뜻밖의 반응이다. 그의 적절치 못한 태도를 욕해줄 줄 알았건만 불쌍하다고? 갑자기 머리를 띵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왜 불쌍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동생은 그가 화가 날 법한 여러 가지 정황을 추측했다. 그 추측이 맞고 틀리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냥 그의 태도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 동생은 마음이 태평양이다. 아, 그리고 참길 잘했다.


7.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절대로 위로할 수 없는 류의 일들이 있다. 깊이 위로하는 척하고 슬픈 표정을 지어 봤지만, 반쪽짜리라는 걸 나 스스로 안다. 똑같은 일을 겪고 나서야 그걸 알았다. 그제야 진짜 위로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럴 때면 나의 솔직한 심정을 조심스레 꺼내어 뜬금없는 용서를 구하고 진짜 위로를 건네고 싶어진다.


8.

ㅡ나 사실 그때 너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 그런데 이제야 그 마음이 뭔지 진짜 알 것 같아. 너 그때 진짜 많이 힘들었겠구나.


9.

이러한 류의 말을 처음 내뱉을 때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인간인가 싶었다. 그렇게 느꼈으면 됐지 그 말을 또 꺼낼 건 뭔가. 하지만 일단 내뱉은 이상 반응이 궁금했다. 놀랍게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백번 이해했다. 과거의 나를 이해했고 현재의 나를 이해했다. 그리고 상처를 안고 돌아온 현재의 나는 현재의 그에게 진짜 위로가 되었다는 걸 눈빛만으로 알 수 있었다.


10.

알고 싶어도 쉽게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다. 갑자기 뚝뚝 떨어지는 눈물의 의미. 소리부터 질러대는 누군가의 비명 속에 숨은 속뜻. 나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비밀들까지. 그럴 때면 그냥 조용히 질문을 던져본다. 가능하다면 그에게, 가능하지 않다면 조언을 구할만한 누군가에게, 그마저도 여의찮다면 나 스스로에게. 그래도 도저히 모르겠다면 그냥 가만히 그 시간을 흘려보내 본다. 어쩌면 시간만이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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