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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Jan 05. 2020

새해의 무한한 기분

올 해는 꼭 외국어


 새해의 무한한 기분이 좋다. 매 년 새롭다. 쉬운 글자로 계획과 다짐을 쓰는데 무언가를 이룬 내 모습을 미리 상상하느라 바보 같은 웃음이 계속 새어 나왔다. 올 해의 버킷리스트 열두 가지를 요약하자면 아주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데. 하루아침에 그렇게 될 리 만무하다는 것을 알면서 새해만 되면 이 즐거운 상상을 멈출 수가 없다. 난감하다. 정신을 차릴 때마다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더니 커피 두 잔쯤 금방 비워냈다.


작년에 쓴 버킷리스트를 보았다. 매 년 이루지 못하고 반복해서 쓰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어 공부와 불어 공부하기'. 정말 마음먹고 하면 잘할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기대로만 남은 일이었다. 왜 매년 시도만 몇 번 해보다 끝나는 영어와 알파벳과 숫자만 알다가 끝나는 불어를 놓지 못할까. 올 해는 할 수 있을까. 왜 잘하고 싶은지 그 목표를 뚜렷이 하면 동기부여가 돼서 목표에 맞는 공부를 할 수 있다던데.


어떻게, 왜 하고 싶은 걸까? 생각해 본다.


우선 영어. 취업을 위해 좋은 영어 성적을 적고 싶어서는 아니다. 바랄 수도 없다. 오래도록 공부를 안 해온 터라 갑자기 열정적으로 뛰어버리면 나는 탈진해버리고 머지않아 영어를 미워할 것이다. 그저 짧은 미드를 보더라도 그 안의 뉘앙스를 읽고 싶은 마음과 영어로 어렵지 않은 대화를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어를 유창하게 하면 왠지 쿨 해 보이고 멋지다. 나도 그렇게 쿨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여행에 가서도 영어에 딱 붙는 제스처를, 이를테면 눈썹 앞머리를 회오리처럼 만들고 고개를 그루비하게 끄덕이며 네가 하는 말 뭔 말인지 안다고. 무리 없이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는 풍경 속에 있고 싶다.


지난여름, 태식과 치앙마이에서 두 달을 지내다 올 때 특히나 간절히 소망했다. 아, 영어를 잘하고 싶다고.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아 죽겠는데 내 입에서는 많은 생략이 들어간 커다랗고 동그란 단어들만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치앙마이의 어느 카페에서 우연히 숀을 마주쳤을 때의 일이다. 숀은 빈티지 옷 가게를 운영하는 새롭게 사귄 친구였다. 한국에서 친구를 우연히 만나도 너무나 신기하고 반가운데 타지에서 완벽한 이방인이었던 나는 그 감정을 더욱 극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뭐야~뭐야! 어쩌다 왔어~!"라고 말하고 싶던 나의 요란한 한국어 말투와 억양 그대로


"와이 컴~! 유  와이 컴~~~!!"이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이 ,  와이컴. 기쁜 마음으로 말해 다행이다.


영어를 잘했다면 " what brings you here! it's amazing to see you!"라고 했을 텐데.

(방금 검색을 해보았다.)


숀은 유창했다. 다행히 내 신난 마음을 읽었는지 미소를 짓곤 나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치앙마이 여행객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을 만들기 위해 유명한 카페와 맛집들을 다닌다고 했다.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는 있는데 왜 입 밖으로는 이것밖에 말 하지 못 하는 걸까.


"와우 유 어썸~~ 베리 쿨~~~"


나는 웃음으로 마무리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어색해질 쯤 제자리로 왔다. 영어로 긴 얘기를 하게 될 때면 '몸으로 말해요' 퀴즈를 푸는 기분이 들었다. 상대는 유심히 내 말과 바디랭귀지를 관찰했다. 알아 들었을 땐 어려웠던 문제의 정답을 맞힌 표정으로 " Oh, I got it! "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고마운 일이다. 번역기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가 제3의 언어로 이렇게나 정성 들여 소통을 하고 있다는 마음에 운동회에서 같은 팀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번역기 없이 잘하고 싶다. 번역기보다는 상대의 눈과 입을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소통을 '잘' 하고 싶다. 올 해는 차분하게 다시 영어 공부를 해보자며 계획을 천천히 세워본다. 새 해란 그런 기능을 한다. 새롭게 리셋 버튼을 눌러주는 기능. 다시 해보자며 깨끗한 흰 페이지를 무한히 제공해주는 기능. 사실 무엇이던 할 수 있다고.


불어는 불어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져서 공부하고 싶었다. 아주 쉬운 불어 동화책을 읽고 오늘 무엇을 먹고 무엇을 했는지 정도의 일기 쓰기가 가능한 수준으로 말이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어로 편지를 써주고 서툰 발음으로 읽어주고 싶다.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파리는 내게 로망의 도시여서 언젠가 파리 여행을 가게 되면 레스토랑에서 느린 말로 주문을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도록 해왔다.


불어 책을 오랜만에 열어본다. 먼지가 쌓여있다. 역시나 앞 페이지만 공부한 흔적이 있다. 올 해는 꼭 1단원을 넘겨야지. 말하면 이루어진다고 프랑스에 가고 말겠다, 자주 얘기한 터라 그 미래가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이젠 정말 불어를 익혀놓고 싶다.


매 년 다짐만 하고 마는 외국어 공부. 새해에는 다짐으로만 끝나지 않게 즐기면서 이뤄나가고 싶다. 사실 계획을 쓸 때부터 스스로에게 반은 미리 실망해버렸기 때문에 버킷리스트에 외국어 공부는 늘 맨 아래 칸을 차지했다. 소심하게 기대하는 것이다. 정말 할 수 있을까? 보다는 정말 할 수 있을 거야!라는 느낌표가 담긴 마음으로 이번에는 맨 위칸에 적었다. 천천히 꾸준히 시도하는 것. 잘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가능성이나 아슬아슬한 기대로만 남겨두지 않는 것. 모두가 새해에 바라며 적은 작고 커다란 모든 일들을 이뤄내면 좋겠다. 새해의 무한한 기분을 맘껏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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