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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Jan 13. 2020

숏 컷을 했다

해보고 싶은 일


 어느덧 여름밤이 푸르게 저물고 있었다. 나는 한 시간 가량 걸린 머리가 끝나고 미용실을 나와 긴장했던 목과 허리를 풀며 기지개를 켰다. 짧고 직선적인 머리칼들은 몸을 숙인 방향으로 떨어져도 얼굴의 반을 덮지 못했다. 나는 허전해진 목 뒤와 시원한 바람이 닿는 귀 끝을 감각했다. 단정하고 왠지 의젓해 보이는 숏 컷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어안이 벙벙하고도 새로워 걸음을 멈추고 태식을 보며 웃었다. 태식은 "거봐, 숏 컷 잘 어울릴 거라 그랬지?" 하며 뿌듯해했다. 그리곤 저녁으로 무엇을 먹고 싶은지 내게 물어왔다. 그 말에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이제 이 짧은 머리로 치앙마이에서 남은 한 달을 이어 살겠구나. 수없이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 사이로 가끔 풀 벌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머리를 느닷없이 가볍게 자르고 나면 빨리 집에 가서 샴푸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전보다 얼마나 가벼울지 그 기쁨을 아는 일은 짧아진 머리의 특권이기도 하다. 청량해진 기분 탓에 꼭 이온음료가 마시고 싶었다. 우리는 포카리 스웨트 두 병과 야시장에서 파는 치킨 몇 조각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발걸음도 마주 잡은 손도 가벼워진 머리칼 끝처럼 가벼이 날았다.


 그동안 내 핸드폰에는 숏 컷을 한 여자들의 사진이 꽤 있었다. 여러 국적의 숏 컷이 무척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계절별로 모아 왔다. 언젠가 할지도 모른다며 그래 온 일이었다. 혼자 그럴싸한 상상도 자주 해서 겨울이면 목폴라에 머리칼을 잔뜩 욱여넣어 숏 컷인 척 거울 앞에 서 보고, 여름이면 긴 머리를 최대한 둥글게 말아 할 수 있는 한 가장 짧은 머리인 척을 해봤다. 삐져나온 머리를 버겁게 붙잡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 나머지 머리들은 없다고 생각해봐. 어때?" 하며 숏 컷의 모습을 자주 예측하게 했다. 은숙은 그렇게 까지 해야겠냐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적극적으로 나를 말렸다. 친구들은 드물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해줬다. 하고 싶으면 해 그래도 아깝지 않니 또는 너 대단하다는 소리는 익숙하게 들었다. 대게 숏 컷이란 그렇게 해봤자 모른다며 난이도를 높이 삼았는데 주변만 봐도 숏 컷을 한 여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쉽게 납득이 되었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을 볼 때부터 숏 컷은 내게 가닿기 어려운 미지의 로망이었다. 마르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고은찬만큼 어울리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무척 커서 시도하지 못했다. 스무 살 쩍만 해도 그랬다. 사실은 다양한 아름다움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기준을 만드는 사회가 이상하다는 것을. 심지어는 그것에 학습되어 스스로가 발맞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마음속 울타리를 허물게 되었다. 하지만 그 울타리를 허물어도 숏 컷을 시도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제는 참을성 없는 내 성격이 문제였다. 숏 컷을 한 뒤 3일 뒤에라도 덜컥 긴 머리가 하고 싶어 지면 정말 어떡하지 싶었다. 단발까지 기르려면 최소 반년 이상은 걸릴 테니까. 나는 그저 운명적으로 해야 할 시기를 혼자 만들어 두었다. 언젠가 꼭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묵고 있는 숙소 근처의 동네 미용실에서 무심하게 자르겠다고. 미지의 것을 더욱 미지의 것으로. 알 수 없게 남겨두었다.


태식이와 나는 긴 여름을 초록빛이 가득한 나라에서 내내 보냈다. 우리는 치앙마이 대학교 후문의 햇빛이 아주 잘 드는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서른 개가 넘는 아침을 맞았을 때쯤, 그 오래된 로망을 왠지 이 동네에서 치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을 했다. 두 달이 조금 넘는 장기여행이란 그 안에서 삶을 새롭고도 익숙하게 이어나가는 연속된 여정이었다. 태식도 머리를 자를 때가 왔다고 했다. 우리는 집 앞을 오가며 동네 미용실들을 살펴봤다. 손님들은 많은지, 자주 문을 여는지 미용실의 분위기는 어떤지를. 버블티를 마시며 걸을 때마다 힐끔 보곤 했다. 나는 책상에 앉아 그동안 모아둔 숏 컷의 이미지들 중 제일 맘에 드는 것을 가려내기 시작하며 다가올 날을 기다렸다.


"싸와디카!" 조금 긴장한 얼굴로 마음에 들었던 미용실 문을 열고 드러 섰다. 어두운 고동색의 차분한 가구도, 반짝 윤이 나는 장판도 외할머니 댁이 생각나는 미용실이었다. 머리가 아주 긴 학생 한 명이 매직 시술을 받는 듯했다. 중년의 미용사는 우리에게 환하게 웃어주며 시간이 오래 걸리니 한 시간 뒤에 오라고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학가 주변이라 우리 동네는 늘 먹거리가 아주 풍족하고 황홀하리 만큼 맛있으며 매우 저렴했다. 우리는 태국 사람들은 전부 요리를 잘하나 보다 라고 자주 얘기했다. 특히나 버블티 가게가 많아서 우리는 미용실 옆의 버블티 가게에서 새로운 버블티를 시키고 앉아 잠시 시간을 보내다 다시 미용실을 찾았다.


바깥은 여전히 밝았고 점심시간은 훌쩍 넘긴 뒤였다. 나는 호기로운 표정으로 미용사에게 원하는 스타일의 사진을 보여줬다. 앞머리가 아주 짧은 오드리 헵번 사진이었다. 그녀는 조금 놀란 듯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진심이라는 눈동자를 보여주었다. 곧이어 커다란 흰 천이 목에 둘러졌다. 그 천에서는 머리에 쓰는 각종 약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를 맡을 때면 왠지 설레기 시작한다. 이 미용실을 개업했을 때부터 있었을까 싶은 천천히 돌아가는 선풍기가 더위를 식혀주고 있었다. 내 책가방만 한 작은 티비에서는 잔잔한 소리들이 평화로이 흘렀다. 이따금 태식이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소리도 들려왔다.


미용사는  하나의 가위만을 썼다. 투박한 일반 가위였다. 한국의 미용실에서   있는 여러 종류의 날을 가진 가위는 없었다. 나는 옆의 서랍에 각종 가위가 있을지도 몰라, 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댕강 댕강 머리가 잘려나가기 시작할   모습이 우스워서 본능적으로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다. 속으로 제발 감당할  있을 정도의 결과만 나오길 바랬다. 그러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는데 삔을 꼽으면 되겠지. 무스를 발라서 넘기면 되지 않을까. 두꺼운 헤어밴드를 하면 어떨까 하며 마음속으로 <대책 마련 리스트>  가지는 작성했던  같다. 각종 불안을 숨기며 경직된 얼굴로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로 보니 태식이는 이런  마음도 모르고 붉은 가죽 소파에 앉아 자고 있었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분주한  마음과 달리 미용사는 신중했고 진지했으며 정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같았다. 층을  때는 가위 날을 세워 천천히 잘라주었다. 미용사는 머리를 자르고 빗으로 정돈하고 또다시 잘라주고 빗어주길 반복했다. 머리칼을 빗기던  보라색 플라스틱 빗은 어찌나 유연했던지, 머리를 잡아끌어 올릴 때마다 빗에 힘이 없어 나는 목이 계속 꺾였다. 그럴수록 최대한 목에 힘을 주어 빳빳이 세웠다. 미용사가 불편하지 않도록. 머리가 망하지 않도록. 발끝까지 힘을 줬다. 반질하게 윤이 났던 미용실 바닥에는 숭숭 잘려나간 머리칼들이 점차 쌓여갔다. 상한 머리들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자니 왠지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어 미소가 지어졌다.  시간 가량 지나자 미용사는 가위를 내려두었다. 미용사는 파티션 뒤의 샴푸실로 나를 안내했고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일어섰다. 아직   없는 기분이었다. 미용사는 부드럽고 달콤한 코코넛 향기의 샴푸로 살살 마사지해주며 머리를 감겨주었다.  따뜻한 향기 아래 손길이 편안해서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나니 깔끔하고 의젓해 보이기까지 한 내가 보였다. 나는 집에 플랫슈즈가 어떤 게 있었는지 와중에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우아한 느낌의 신발이 신고 싶어 지는 머리였다. 태식을 깨우니 그는 깊은 잠에서 깨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생기가 돈다고 그것 보라며 기쁘게 웃었다. 잠시라도 그를 미워했던 내 마음이 미안해졌다. 앞머리가 눈썹 위로 훌렁 짧은 숏 컷의 기분. 가운을 벗으니 긴장을 잔뜩 했어서 그런지 목 뒤가 유난히 뻐근했다. 미용사는 내게 엄지를 들어줬다. 인사를 하고 나올 때 나는 미용사와 둘 만의 우정을 간직하게 된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은숙에게 내 숏 컷 사진들을 찍어 카톡으로 보냈다.


- 귀엽다. 태식이는 뭐래? 결국 하고 싶은 거 했네. 너무 이쁘다.


너무나 보고 싶은 은숙이 답장을 보내왔다. 은숙이 마음에 들어해서 나도 덩달아 기뻤다. 그제야 무사히 모든 게 완료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은숙은 내 허락도 안 받고 부끄러운 셀카들을 가족방에 올리고 먼저 자랑을 했다.


태식은 짧아진 내 머리가 신기한 듯 계속 만져 주었다. 눈이 점점 감기며 잠이 솔솔 왔다. 짧은 머리칼로 베개에 누우니 목에 닿는 서늘한 베갯잇이 깨끗한 느낌을 줬다. 그 날은 치킨을 먹어놓고 양치하는 것도 깜빡하고 잠에 들었다. 숏 컷 별 거 아니구나. 아주 깊고 단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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