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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Jan 19. 2020

시를 읽는 마음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다시 몇에 서서 열차를 놓치고 음미하는 . 2호선 쯤이었을까. 아들이 아버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어느 아버지의 시를 읽었다. 대지가 흔들렸다는 벅찬 울림보다도 연약하고 따뜻한 아기를 연상케 하는 낯선 식물 이름   때문에  발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 듣는 식물의 이름을 읽었을 뿐인데 마음에 대책 없이 붉은 생명력이 꿈틀대며 피어나는 것이다.  식물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그로 인해 생동하던 나의 마음만은 기억한다. 시로 읽히는 글자들은 말해지는 글자들과 사뭇 다르다. 때로는 익숙한 글자도 낯설게 느껴지고 현재를 내려둔  가만히  속으로 유입된다. 지하철이 오길 기다리는  잠시 동안 시를 음미토록  것은 낭만적인 결정이다. 여기 적힌   편이 누군가의 잃어버린 마음, 반의 반이라도 찾아줄지 모른다 생각했다.


교복을 입고 시를 배울 때 나는 화자의 의지를 외우고 자주 등장하는 단어에 형광펜으로 밑 줄을 그어가며 특성과 의미를 암기하기 바빴다. 어수선했던 마음 한 숟가락이라도 내려놓고 시를 먼저 느껴본 적 있었을까. 문제를 맞히겠다는 강박에 부자연스러웠던 일이다. 최근까지도 시집을 읽을 때면 숨겨진 정답이 있는 듯 이런 뜻이나 이런 의미일까 머릿속에서 에둘러 표현하기 바빴다. 그러다 만난 어느 시집은 시를 읽는 경험의 결을 다르게 했다.


우연히 시집 전문 서점을 가게 되면서였다. 혜화역에 내려 친구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해주려고 서점을 검색했다. '동양 서림'이 첫 번째로 뜬다. 가본 적 없지만 어딘지 알 거 같아서 시린 손을 코트 주머니에 폭 넣고 걸어갔다. 1953년부터 있었다는 녹슨 초록의 서점 간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충만함을 안고 이 간판 아래를 지나다녔을까 헤아려본다. 평일 낮에도 작은 서점에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1층에 놓인 책들을 훑어보다 서점 끝에 있는 비밀스러운 나선형의 계단에 눈길이 간다. 살면서 나선형의 계단을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다. 다른 세상이 있을 거라 암시하는 듯한 그 계단을 조금 의아해하며 올라갔다.


그곳은 서점 위의 또 다른 서점이었는데 그것도 시로 가득한 시집 전문 서점이었다. 책 방 주인이 자리를 비워 차분히 가라앉은 공간을 홀로 느낄 수 있었다. 밝은 오렌지색 원목 책장 앞에 서서, 시집들의 제목을 훑는다. 시집의 제목들에는 마음도 눈도 오래 머문다. 아름다운 노랫말 중 가장 아름다운 것만을 모은 어떤 말들을 엿보는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이제니 시인의 시집을 집었다. 우리는 우리를 모른다는 말. 다른 얘기지만, 무례한 줄 모르던 무례한 사람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의 시를 조용히 읊조려 본다. 반복되고 리듬 하는 시구들을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말해 본다. 단어들은 사방팔방에서 너무나 자유로이 그리고 유연하게 조합되어 새로운 감각을 연습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가만히 서서 시집을 더 붙잡고 있어야 했다. 더 천천히 읽어보고 싶어 나는 처음으로 시집을 샀다. 집에 좋은 시집들이 있었지만 내가 직접 골라 읽어보겠다 의지를 지불한 시집은 한 권도 없었다. 그의 시들은 마음을 새롭게 했고 그 리듬들은 모험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지어진 걸까 너무 궁금하여 뒷 면의 해설을 한 페이지 펴본다.


의미를 유보하고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성취하고자 하는 시인이라, 해설은 소개한다. 나는 그 말에 와- 입을 벌리고 소리 없는 탄성을 내질렀다. 누군가 내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균열을 내주면 말할 수 없이 짜릿해진다. 시를 읽을 때 맹목적으로 의미를 찾던 지난날의 나를 떠올린다. 의미에 너무나 강박을 두고 있었다. 고작 몇 편 읽고 벌써 해설을 꺼내 들었으니. 나는 그 한 페이지의 해설만 읽고 해설은 덮었다. 말의 운동 자체를, 언어 그 자체를 먼저 느껴보기로 했다. 의미를 헤아리기 전에 태어나고 있는 것들을 향하여.


내가 시집의 제목만을 훑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였을까? 지하철에서 낯선 식물 이름 세 자에 발에 힘이 들어갔던 일도 시의 순수한 파장이었을까. 존재함으로 아름다운 언어들, 글자들.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보면 나는 그 글자들에 파묻히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쌓아 올려지는 소중한 것에 더 귀 기울이기로 해본다.


맹목적인 것에, 당연한 것에 나는 자꾸 질문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시 집 뒤표지의 시인의 글-


말하지 않는 말로 말할 때, 말하지 않은 말로 말할 때, 서로에게 서로를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그때,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만 희미한 암시로. 다만 흐릿한 리듬으로.


뜻 없는 것들. 뜻 없는 것들. 뜻 없는 것들.


무한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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