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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Jan 03. 2022

에브리띵 윌 비 오케이

에어로빅이 준 선물

  때는 2013년 2월. 학에 입학하기 한 달 전이었다. 보통 이 시기에는 대학 생활의 자유를 꿈꾸며 수험생 할인으로 염색을 한다거나, 놀이공원에 가거나 하는데 나는 그다지 의욕이 없는 애였다. 2년을 고3으로 지내서 확실히 홀가분했지만 당시에는 원하던 대학에 붙지 못했다며 썩 개운해하지도 않았다. 밥을 먹으러 거실에 나갈 때를 제외하곤 침대에 늘어져 보고 싶던 영화와 드라마를 실컷 보았다. 점심을 먹다 은숙은 누구네 엄마가 에어로빅을 다니는데 혈액순환도 되고 좋다더라, 다녀볼래 하며 에어로빅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오래 달리기라면 중간에 픽 쓰러질 만큼 체력도 약했고, 엉덩이도 많이 무거워진 터라 알았다고 했다. 하다 보면 살도 빠지겠지. 저녁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9시 타임을 들으러 갔다. 은숙과 자주 가던 마트 맨 꼭대기 층에 에어로빅 센터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반짝이 스팽글이 잔뜩 달리고, 쿨 톤의 야광빛 티셔츠를 입은 중년의 언니들이 거울을 보며 몸을 길게 늘리고 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고탄성의 커피 스타킹까지 더해져 범상치 않은 레벨이 느껴졌다. 세상에. 나 상급반에 잘못 왔나 봐. 처음 온 사람임을 티 내며 선생님께 걸어갔다. 열 발자국쯤 남았을 때 선생님의 짙은 스모키 아이즈와 눈이 마주쳤고 "응, 어디던 가서 서."라고 하셨다. 에어로빅의 당당한 성질이 조금씩 수혈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개미만 한 목소리로 가볍게 목례를 하며 최대한 뒷자리에 섰다. 신발끈을 고쳐 매던 선생님은 처음 온 애가 뒤에 가면 뭘 배우겠냐며 앞으로 좀 나오라 하셨다. 난감하고도 맞는 말씀에 별 수 없이 중간쯤에 섰다. 아이돌 댄스 연습실처럼 정면은 통으로 거울이었고 그제야 나의 후줄근한 회색 추리닝이 얼마나 부적합한지 한눈에 들어왔다. 머쓱해져 근육을 푸는 척 주변을 살폈다. 평균 연령 50대의 건강한 여자들이었다. 설에 녹두전만 삼십 장 부쳐서 이제 기름 냄새 못 맡겠어. 하면, 사거리에 맛있는 아구찜 집 있잖아 하는 생활밀착형 대화가 오고 갔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딸아이와 도착한 여성은 그간 내 또래가 없었는지 "이야~ 젊은 언니가 왔네! 언니랑 인사해~ "하며 나와 반갑게 인사시켰다. 둘, 넷, 여섯, 여덟, 열 , 열 세명의 언니들과 한 명의 어린이 그리고 나. 인원 끝.  


 연두색 시트지를 바른 창문 에/어/로/빅 글자가 착/착/착/착 닫힐 때마다 호프집 야외 테이블의 대화 소리, 아파트 개 짖는 소리, 늦은 밤 놀이터를 점령한 초딩들의 짜릿한 비명소리가 묵직하게 차단되었다.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각자 진지한 눈빛으로 거울을 보며 몸을 살짝씩 비틀었고  선생님은 선곡을 마친 듯했다.

큐 싸인.

허어압!

언니들의 기합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팡팡 터지는 반주에 맞춰 팔을 대각선으로 쭉쭉 뻗고 무릎을 가슴팍까지 올리며 리듬을 탔다. 직선적이고 파워풀한 동작을 막상 따라 하려니 쑥스러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미약하게나마 흔들며 이 시간에 흡수되어 보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빠르게 시야에 주입되는 몸짓들을 반 박자씩 느리게 따라 추었다. 노래 때문에 약간 신이 나는 것도 같았다. 이 비트가 심장을 뛰게 하는 건지, 사방에 설치된 스피커가 대단해서 심장이 뛰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몸속 깊이 쿵쿵 울리고 있었다. 이어 난데없이 감미로운 남자 목소리가 얹어지기도 했다. 성시경 노래 중에 신나는 노래가 있었나, 생각하며 어느덧 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 여기까지가 준비운동이란다. 50분 뒤의 회색 추리닝이 점차 걱정되었다.  


 선생님은 윷놀이할 때 쓰는 윷을 머리 위로 탁탁 치며 교실을 돌아다녔고 박자를 셌다. 원 투 쓰리 포, 투 투 쓰리 포. 노래가 절정에 다다를수록 동작이 복잡해지고 현란했다. 어쩔 땐 언니들도 각자 다른 동작을 추며 우왕좌왕했다. 누굴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입술만 바짝 말라갔다. 긴장한 모습이 티가 났는지 에이스로 보이는 언니가 눈을 찡긋 맞추고 웃어주었다. 잘하고 있다고 신호를 주듯 간간히 고개도 끄덕여주었다. 쪼그라든 마음이 말랑해지면서 발 끝에 뻔뻔한 자신감이 실렸다. 그 언니와 손을 잡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도는 동작도 했는데 왕 큐빅이 달린 하얀 매니큐어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에이스 언니는 손목을 돌릴 때에도 강인하면서 우아했다. "웃어! 밝게! 무조건 웃어!" 선생님은 계속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다들 즐겁고 생기가 넘쳐 보였다. 다리를 찢어 올리는 동작에 곡소리를 내는 회원은 나뿐, 모두 그 정도쯤 파이팅 넘치게 해냈다. 유연함과 근력, 체력에 나이가 상관이 없구나. 다들 에어로빅을 얼마나 해온 걸까 궁금했다. 거울 속 자신에게 눈을 떼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하는 사투와도 같은 모습에, 그들이 어떤 한을 풀고 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에어로빅 버전으로 리믹스된 옛날 가요에 추는 어설픈 몸짓이 부끄러웠지만 더는 눈치를 보지 않았다. 저마다의 흥과 저마다의 자신감이 있었다.


 수업이 막바지에 이르자 선생님은 조명을 살짝 어둡게 해서 차분한 분위기를 만드셨다. 이번엔 구슬픈 발라드가 흘러나왔다. 선생님의 플레이리스트는 예측할 수 없지만 확실히 케이팝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지막 요가를 했다. 어둠 속에서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 에 맞추어하는 요가가 웅장하고 슬퍼서 조금 웃음이 났다.


 형광등이 탁 켜지고 다 같이 박수를 치며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를 나눴다. 한 편의 연극이 끝나고 커튼콜을 하는 배우의 기분이란 이런 걸까? 터보의 검은 고양이부터 알리의 365 일까지 K-에어로빅이 주는 감정의 희로애락을 겪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얼얼하고도 자랑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창 밖으로 신선한 겨울바람이 들어와 등에 들러붙은 땀은 차갑게 식고 있었다. 선생님이 다가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어때? 재밌지? 할 만 하지? 자주 와." 하셨다. 몇몇 분들도 집에 갈 땐 내일 보자고 인사를 건네주셨다. 마음 안쪽이 환해지는 경험이었다.


 당당한 성질 속에 있으니 나도 약간 당당해졌다. 에어로빅과 선생님, 언니들의 프로페셔널한 애티튜드. 이 모든 외적 형식을 빌려 그저 재밌게 열심히 해보자는 자신감이 태어났으니. 나는 은숙에게 노란색은 아쉬우니 눈에 띄는 라임색 추리닝을 사달라고 했다. 그걸 입고 한 달 동안 에어로빅을 다녔다. 하도 잘 먹어서 그랬는지 군살은 빠졌지만 통통한 볼 살은 빠지지 않았다.


 3월 특유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정말 신입생이 되었을 때, 학교는 1학년을 환영하는 과 행사와 모임으로 가득했다. 선배들로부터 모두 추리닝을 챙겨 오라는 공지를 받았다. 예술관에서 학교 정문까지 뛸 건데 그것이 대대로 내려져오는 연영과의 전통 행사라고 했다. 포천의 드넓은 평야를 차지한 우리 학교는 그 거리가 장장 3km에 달했다. 학창 시절 오래 달리기를 완주한 적이 없던 나는 겁이 났다. 신입생이 처음부터 아픈 척하고 빠지면 그것도 좀 아닌 것 같고, 중간에 입술이 퍼렇게 질려서 쓰러지자니 그것도 고개가 저어졌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뒤에 승용차까지 따라붙는다 했을 때는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피할 방법이 없구나. 최대한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차리자 다짐했다. 여자애들끼리 가끔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모이면 솔직해졌는데 그거 진짜 뛰기 싫지 않냐고 입을 모아 말했다.


 호루라기가 삐힉-- 울렸다. 연영과의 커다란 깃발을 맨 앞의 두 남자 선배가 펄럭이며 뛰기 시작했다. 어스름이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었고 포천의 해질녘은 마르고 건조한 장작이 타는 듯한 냄새가 났다. 몇십 명이 길게 줄을 섰는데 인원이 많아서 그랬는지 선배들이 무서웠는지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과의 구호까지 한 마음으로 외치는데 병아리 같은 신입생 입장에선 용맹한 기운이 느껴진달까. 냅다 뛸 수밖에 없었다. 절반도 안 왔는데 뒤에서 동기들의 힘든 숨소리가 들려왔고 중간쯤에 연희라는 애가 "입으로 절대 숨 쉬지 마! 코로 숨 쉬어, 감기 걸려!" 하며 다급히 코치했다. 말도 잘 없는 애가 그런 말을 해서 쟤 멋있는 애구나. 싶었다. 서로가 아직 낯선 사이였지만 챙겨주는 그 애틋한 마음 하나로 팀워크가 생겨났다. 한 번도 안 쉬고 뛰어서 힘들어 죽을 것 같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너도 나도 그렇긴 한데 "거의 다 왔어! 할 수 있어! " 말해 주었고 서로를 이끌어주었다. 이상한 건 뛸수록 너무 가볍고 거뜬하다는 감각이었다. 숨을 컨트롤 할 수 있다니. 나는 시야가 까매지지도, 머리가 핑 돌지도 않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며 뛰었다.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그렇게 속도를 늦추며 결승선인 정문에 도착했다. 여기저기서 헉헉 숨 고르는 소리, 안도의 한 숨소리, 배고프다는 소리가 마구 섞여 들려왔다. 순식간에 깜깜해진 남색의 하늘을 보니 투명한 초승달과 별이 반짝이고 있어 드라마틱한 나의 완주가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약간 먼 슈퍼에 뛰어다녀온 정도로 괜찮았다. 외투에서 손거울을 꺼내 앞머리가 괜찮은지나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애가 "언니는 어떻게 멀쩡해? 어떻게 안 힘들어?" 물었다. 한 달간 에어로빅으로 단련했기 때문이야.라고 말하지 못하고 원래 체력이 좋았던 척 겸손을 떨었다. 정문에 도착해서 삼겹살까지 먹는 것이 행사의 마지막이란다. 에어로빅이 길러준 자신감과 당당한 기분, 체력이 내 안에 살아있다고 믿으며 기분 좋게 배를 채웠다. 물기 묻은 상추쌈이 그렇게 달았다.


 집에 도착하면 완주를 해냈고 하나도 안 힘들었다 자랑할 참이었는데, 오빠는 하루 사이에 얼굴이 어떻게 반 쪽이 되어 왔냐고 무슨 일이냐 물었다. 나는 기쁘게 정말? 하고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거실에서 은숙이 우리 과의 뛰는 행사를 대신 설명해주었다. 통통한 볼 살이 빠진. 쉬지 않고 오래 달릴 수 있는. 응원할 줄 아는 진정 어른이 된 기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엄마, 나는 오늘 이대로 잘 거야.

추운 날에 흘린 땀 때문인지 비릿한 철봉 냄새가 나는 외투를 벗어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걱정과 달리 모든 건 하다 보면 괜찮아지는 때가 온다. 라임색 추리닝 윗도리에는 "Everything will be okay."가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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