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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May 07. 2021

반성문  긴 세월을 먹고도 너희는

온몸으로 겸손해서 고맙습니다.


처음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던 너희와 한 식구가 되었던 날, 이름조차 모르고, 물은 언제 주고, 분갈이는 어찌하고, 영양제는 또 뭐란 말인가. 당황했던 나. 나보다 더 이 집에 오래 살았던 너희들에게 눈길조차 제대로 줘 본 적 없었는데, 나와 너희가 함께 살게 되다니.

너희는 텃세라도 부리고 싶을 지경이었을 것이야. 가끔 와서도 눈조차 마주쳐주지 않았던 무심했던 사람을 곱게 볼 리가 없지. 그렇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하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물밖에 너희에게 주지 못하는 못난 동거인이라네.

너희에게 물을 줄 때마다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미안하다는 말만 했었지. 오늘도 미안함 한 사발 부어주었네. 나는 혹시 반려 식물 학대자는 아닐까. 가끔 무섭다.


오늘 물을 주면서, 이제야 찾아본 너희들의 이름을 처음 불러보았네. 아 이토록 쉬운 문명을 활용할 줄 모르는 나는 무지한 자.

내가 좋든, 싫든, 화내지도 않고 잔소리도 않고, 늘 그 자리에서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너희들.

고맙습니다.


그렇게 수년째 같이 나이를 먹고 있으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귀찮다는 핑계로, 거드름이나 피우면서 너희들을 방치했던 시간에도 너희는 새로운 싹을 피우고, 한치의 어김도 없이 꽃을 피워주다니. 한없는 아량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군자란


여전히 무심한 나는 어느 날 새끼를 친 군자란 너를 보았지. 하나는 그대론데, 다른 하나는 자꾸 옆에서 싹을 피우더라. 경이로움. 왜냐면 나는 너희를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던 못된 동거인이니까.

좁은 자리에서도 힘든 내색 없이 서로를 기대며 열심히 정을 나누던 너희들. 겨우 그 새끼들을 다른 화분에 독립을 시키고, 물만 줬는데도 어느새 훌쩍 어른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아마릴리스


아 아마릴리스! 너의 화려한 자태를 못 본 지가 좀 되었구나. 3월이면 꽃을 피워줄 꽃대들이 자라나고 꽃봉오리가 열리며 시나브로 너의 팜므파탈 같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야 마는, 너는 가히 향기롭고 강렬한 녀석인데.

너는 위험한 아름다움을 가진 걸까. 고양이에게 너는 위험한 존재라고 해서 꽃 피우는 걸 못하게 하는 나를 용서해줘. 꽃을 피우기 위해 일 년 동안 쉼 없이 너를 단련했을 텐데. 마당이 있었다면 좋았을까. 베란다는 너무 좁기만 하다.

미안합니다.


자주색 달개비


어디로 갈래. 기약 없는 방향성으로 여기저기 너를 늘어뜨리는, 너의 이름은 달개비였구나. 이렇게 예쁜 꽃을 잊지 않고 피우는 달개비.

고맙습니다.



크라술라 포르툴라세아(염좌 다육)


이렇게 어려운 이름이었을 줄이야. 마치 나무처럼 점점 더 풍성해지는 크라술라야

고맙습니다.



만손초 다육


어디에 떨어져도 살아내는 너는 정말 강한 생명력을 지녔지. 막 대해도 이렇게 꿋꿋이 그 자리에 있는 너.

고맙습니다.



관음죽


너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관음죽.

오늘도 너의 잎을 냥이에게 내어 주었지. 다듬어도 어느새 너의 잎들이 처참하게 잘려 나가 있음을 그냥 두고 본 나는 공범. 힘들게 힘들게 스스로를 지켜내고 있는 너.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베란다에 볕이 잘 들어서 다행이야. 물과 볕만 먹고사는 가난에 익숙해져 버린 너희야

그렇게 버려두고 먹지도 못할 사과만 주는 못난 동거인이라서 미안해.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고, 그래도 너희와 함께여서 나는 행복해.

이렇게 이기적인 나여서 

반성합니다.


긴 세월을 먹고도 너희는 옛날 같아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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