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음악은 몸보다 마음을 먼저 데운다.
‘안다 박수’라는 말이 있다. 클래식에서 곡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혹은 여운이 필요한 침묵의 순간에 ‘나 이 곡 안다’는 듯 성급하게 터져 나오는 박수를 말한다. 애틋한 분위기에 더 머무르고 싶은 관객에겐 여간 씁쓸한 게 아니다.
클래식 초보인 나는 절대로 ‘안다 박수’를 칠 수 없다. 공연이 끝났을 때, 감동이 차올라도 주변 눈치를 살피며 한 박자 늦게 박수를 친다. ‘모른다 박수’를 치는 것이다. 이 박수는 초보자가 누리는 즐거움이고 음악에 대한 예의이다.
매년 초에 치르는 연례행사가 있다. 친구와 함께 지자체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에 가는 것이다. 솔직히 클래식보다 트로트가 좋은 나는 이 공연을 잊어버리고 지내는데, 친구는 해마다 그 일정을 확인, 표를 예매하고 연락을 한다. 고마운 일이다. 추운 계절에 따뜻함을 느낀다. 공연 날짜가 다가오면서 클래식 초보는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맞이할 생각에 긴장이 된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곡을 연주하면 어쩌지? 그렇다고 아는 척을 할 수도 없고? 공연 시간 90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갑자기 오래전 오페라 강의에서 들었던 ‘감상꿀팁’이 생각난다. 미리 공부하고 가는 것이다. 해당 오케스트라 홈페이지에서 프로그램을 확인하고, 연주곡에 대한 정보를 AI에게 물어본다. 이어서 유튜브에 들어가 반복해서 듣는다. 이제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실제 공연은 유튜브로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유튜브 화면에 갇혀 있던 소리들이 현장의 공기를 타고 생동감 있게 살아난다. 음악만 듣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긴장, 몸짓, 너머에 보이는 땀방울, 그리고 관객들의 반응까지. 연주자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이래서 음악회에 가는 거구나! 예습의 효과는 크다. 연주되는 곡이 귀에 익숙한 탓에 전체적인 분위기를 최대한 즐기려고 애를 쓴다.
지휘자는 온몸으로 음악을 만든다. 몸짓 하나에 특정 악기들이 대답하고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변한다. 귀 기울여 듣고 눈여겨보면 누군가의 비밀 대화를 지켜보는 듯하다. 순간의 표정까지 볼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날 지휘자는 양복 정장을 입었는데, 몸짓이 커질 때마다 바지 허벅지 부분에 크게 잡히는 주름이 신경이 쓰였다. 문득, 저래서 지휘자들이 주로 연미복을 입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자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앞쪽에 자리한 수십 명의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마치 한 몸처럼 활을 위아래로 맞추어 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다. 하지만 머리, 어깨, 팔의 동작은 각양각색이어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다를 것 같다. 특히 수석 연주자의 몸짓은 어느 연주자보다 크고 눈에 띈다. 한껏 긴장한 채 음악에 몰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만히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폭발하는 타악기 연주자들의 타이밍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있는 힘껏 두드릴 때의 후련함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가끔은 나도 그 타이밍을 맞춰 마음속으로 세게 때려 보면, 그 시원함은 가슴 깊은 곳까지 닿는다. 우아한 분위기의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요정의 춤을 보는 것 같다. 연주자의 손가락 끝이 현을 스칠 때마다 잔잔한 물결 위에 달빛이 스치는 느낌을 준다. 이 연주를 보고 있자니, 십여 년 전 캐나다 로키 여행 중에 호텔 로비에서 하프 연주를 처음 보고 들으며 느꼈던 그날의 설렘이 되살아난다.
신년 음악회 마지막 곡은 라벨(Maurice Ravel)의 ‘볼레로(Bolero)’였다. 이 곡의 별명은 ‘세상에서 가장 긴 크레셴도(Crescendo)’이다. 이 곡은 약 15분 동안 단 두 가지 선율만이 단조롭게 반복된다. 미세한 속삭임으로 시작해 악기가 하나둘 더해지며 점차 소리가 두터워진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오케스트라 전원이 폭발하듯 압도적인 사운드를 내며 절정을 이룬다. 전율이 돋는다. 점차 높아지는 에너지와 마지막 웅장함이 신나는 새해를 희망하는 듯하다.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작은북의 변함없는 리듬이 심장 박동 역할을 한다. 곡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똑같은 리듬을 169번이나 치는 작은북 연주자 표정이 궁금해 공연 내내 그 모습을 제대로 보려고 애를 썼다. 팔이 저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음악을 넘어 그의 수고가 느껴진다.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악기와 연주자를 하나하나 소개할 때 작은북 연주자에게 가장 큰 박수를 보냈던 것 같다.
모든 연주자의 움직임은 단 하나의 음악을 위한 것이다. 바이올린의 떨림이 첼로의 무게와 만나고, 플루트의 가벼움이 팀파니의 무게에 실려 공기 중에 흩어진다. 하프는 영적인 울림을 더한다. 각 연주자의 몸짓이 한 공간에서 부딪히고 스며들어 교향곡을 만든다. 겨울에 듣는 음악은 몸보다 마음을 먼저 데운다. 콘서트홀을 나왔다. 겨울 찬 바람이 매섭다. 그럼에도 기분은 훈훈하다.
친구와 공연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가는 길에 지하철역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젊은 부부와 우리뿐이다. 문이 열리고 앞에 있었던 내가 내리려는데 친구가 나를 잡아끈다. 나중에 내리자고 한다. 나는 의아해하며 왜?라고 했더니 친구는 답 대신 안쪽에 있는 젊은 부부에게 ‘먼저 내리세요’라고 한다. 뒤돌아보니 부인이 임신부이다. 친구가 그분들에게 하는 말 ‘축하드립니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 안에 온기가 퍼졌다.
우리는 정을 나누며 겨울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