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음식

솔갱지 고들빼기김치

by 레츠고하이



50여 년 전, 내게 아주 좋은 일이 있었다. 내 인생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일이다. 대학에 합격하였다.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던 서울살이에 신나는 일이 거의 없으셨던 어머님이 친정에 전화하신다. SKY도 아니고 그렇게 자랑할 일이 아닌데도, 당신이 바보가 되는 줄 모르고, 아들 자랑하신다. 외할머니부터 온 가족 돌아가며 한참 통화하시더니 외삼촌이 “나를 바꿔 달라”라고 한다며 송수화기를 나에게 건네신다. 외삼촌은 특유의 억양으로 “수고했다. 축하한다.” 등 인사말을 건네신 후, 대학 입학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외가에 다녀가면 어떻겠냐?”라고 하신다. 여행이라곤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전부였던 나는 처음으로 여행다운 여행을 하게 되었다.


외갓집이 있는 경북 예천군 하리면은 첩첩 산골이다. 과잉투자 아닌가? 싶다가도, 사통팔달 길은 참 잘 뚫어 놓았네!라고, 감탄하는 요즘에도, 네이버 지도에서 대중교통으로 ‘우리 집 출발, 하리면 도착’ 길 찾기를 해 보면 5시간 걸린다. 여행길에 올랐다. 집에서 청량리역, 기차를 타고 영주역, 버스로 예천읍, 다음에 하리면, 기차는 고속열차가 아니고 도로는 당연히 비포장도로이다. 차창 밖 풍경이 낯설다. 마음은 앞으로 펼쳐질 대학 생활과 진로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지만, 한편으로는 처음 방문하는 외가에 대한 기대와 농촌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외가에 도착했다. 외할머님은 맨발로 뛰어나와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라며 긴 세월 간직한 거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으셨다.


외가는 조그만 산골 마을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멀리 앞으로는 제법 큰 시내가 흐르고, 오른쪽에는 키 큰 소나무 숲이 울창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을 이름이 ‘솔갱지’이다. 해가 질 녘, 굴뚝마다 피어오른 하얀 연기는 서로 섞이고 넓게 퍼져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는다. 무척 평화로운 풍경이다. 시내 너머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가 일으키는 누런 먼지도 주변 산과 어울려 그림처럼 아름답다. 경상도 특유의 억양과 사투리, 외양간에서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 밥 짓는 냄새, 뜨끈뜨끈한 방바닥,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가구들, 모든 것이 생경하지만, 우리 것의 정겨움을 느끼게 했다.


외가에서 나는 귀빈이었다. 밥상에는 매번, 가난했던 시절에 여간해선 먹을 수 없는 고기반찬이 올랐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반찬이 있었다. 잎이 달린 자그마한 인삼으로 만든 김치 같다. 근처의 풍기 인삼이 유명하다지만, 인삼으로 김치를 만들 리는 없고. 외할머님께 “이것은 뭔가요?” 여쭤보니 “처음 먹어 볼 거라며 한번 먹어 보라”라고 하신다. 먼저 젓가락으로 조금 집어 냄새를 맡아본다. 익숙한 김치와는 색다른, 야생의 냄새가 풍긴다. 낯설지만 매력을 느낀다. 궁금한 맘으로 입에 넣었다.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맛이다. 쌉쌀함, 시큼함, 달콤함, 그리고 뿌리의 아삭한 식감이 어우러진 맛이 기가 막힌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맛이다. 굳이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감칠맛의 극치, 그야말로 별미였다. 이번엔 밥에 얹어 먹어 본다. 특유의 향과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며, 몸속 깊숙이 스며든다, “맛있네요”를 반복하니 외할머님이 답을 주신다. 고들빼기김치라고 한다. 식사할 때마다 너무 맛있게 먹었다. 서울로 올라올 때 숙모님은 선물이라며 이 김치를 따로 포장해 주셨다.

어머님께 고들빼기김치를 건네며 외가에서 너무 맛있게 먹었다고 얘기를 했다. 손이 상당히 많이 가는 김치라고 말씀하셨다. 한참 후, 일을 놓으신 어머님께서 고들빼기김치를 담그셨다. 기가 막혔던 맛을 떠올리며 먹어 본다. 아니다. 그 맛이 아니다. 결혼했다. 언젠가 아내와 서로 외갓집 얘기를 하다 고들빼기김치 맛에 대해 말하였다. 아내가 외숙모님께 방법을 묻고, 어머님께 보충 설명을 듣고, 고들빼기김치를 만든다. 미안하지만, 아니다. 그 후에도 아내는 여러 번 도전했지만 내 마음을 얻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김치 맛은 재료의 합을 넘어, 만드는 사람의 손맛, 정성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순간적인 정서와 기억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예술이라고도 한다. 다를 수밖에 없다. 최고의 김치 명인이 만든다 해도 외가의 마음, 사랑, 풍경, 물, 그리고 공기까지 담아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 당시 나는 외갓집에서 최고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


가끔 시장에서 고들빼기김치를 만나면 늘 발걸음을 멈춘다. 혹시? 하는 맘으로 시식해 보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맛을 본다. 어느 것도 그 맛이 아니다. 그러니 살 수가 없다. 솔갱지 고들빼기김치 맛은 아직도 내 맘 깊이 똬리를 틀고 나오지 않는다. 봄이 수십 번 왔다 갔는데 말이다.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난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외가 모습을 떠올리고 그려본다. 외가 식구들, 솔갱지 소나무, 시내, 억센 사투리, 소 울음소리, 밥 짓는 냄새와 하얀 연기, 뜨끈뜨끈한 방바닥, 그리고 환대 등. 아름답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넉넉해진다. 나를 추억 속으로 이끈다. 당당하고, 에너지 넘치고, 꿈 많았던 어린 청년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게 바로 멋이다. 그토록 찾아 헤맨 솔갱지 고들빼기김치 맛은 외가의 멋이다. 시간을 내어 50여 년 전 멋과 맛을 찾아 떠나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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