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

반사

by 레츠고하이


‘지혜학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우리 인문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퇴직 후에 여기저기 도서관을 기웃거리다 지혜학교를 알게 된 후, 지금까지 20개 정도의 강의를 들었다. 그야말로 인문학 소양을 쌓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올해 개설된 강의 목록에서 강의 내용, 강사 이력, 강의 시간, 장소 등을 꼼꼼히 따져 AI 관련 강의를 수강하기로 했다. 주당 3시간씩 13주 강의이다. 주최 측은 이 강의를 “급변하는 AI 기술과 공존하는 인문학의 역할”이라고 소개하였다. 나는 특히 이 문구에 매력을 느꼈다. 지혜학교 프로그램은 수준도 높고, 인기가 많아 수강 신청하려면 나 같은 시니어는 꽤 신경을 써야 한다. 온라인상에서 선착순으로 마감하기 때문이다. 젊은 분들과 손가락 움직임 속도를 경쟁하여야 하는데 아무래도 느리다. 미리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수강 신청하는 날 9시 전부터 컴퓨터 켜고 해당 기관에 로그인 후, 이미 접수 중인 다른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수강 신청 연습을 여러 번 했다. 준비 완료. 9시가 되었다. 수강 신청을 마쳤다. 야호! 후련하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마 거의 1등으로 수강 신청했던 것 같다.


드디어 기다리던 첫 강의 시간이다. 이런 말이 있다. 잘 나가는 강사가 되려면 수강생들에게 자기가 대단한 사람임을 수시로 어필해야 한다. 실제로 이런저런 강의를 듣다 보면 강사분들이 은근히 자기 자랑을 많이 한다. 대학교수인 강사님이 자기소개를 한다. 이 비법을 적용하는 듯 자신의 학력과 경력을 이야기하는데 자기 자랑이 대단하다. 이어서 차원이 다른 자랑이 이어진다. 교묘한 심리전을 벌이는 것 같기도 하다. “잘 못 엮여서 이 강의를 맡게 되었다.” “자기가 지금까지 한 강의 중에서 강사료가 가장 싼 강의이다.” “미국에서 강의했을 때 받은 강사료의 1/100 정도 강사료로 이 강의를 한다.” 나는 지혜학교의 강사료 수준을 어느 정도 안다. 이분이 미국에서 어떤 강의를 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진짜 대단한 분인가 보다. 수강 신청하기를 참 잘했다. 많이 배워야지. 말 한마디도 놓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소개 마무리에 “나는 여러분을 위한 강의가 아니라 나를 위한 강의를 할 것이다”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들어 줄만 했는데 좀 거슬린다. 아무리 잘난 분이어도 이건 아니다. 수강생들에 대한 예의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더니 “나는 문학을 잘 모른다. 문학에 대해서는 해줄 얘기가 없다”라고 한다. 이건 뭐지? 나는 AI와 인문학의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이 강의를 수강 신청했는데 문학에 대해서는 해줄 얘기가 없다니. 바로 나를 보듬는다. 수강생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의미가 있을 거야. 자기를 위한 강의를 한다면 더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하시겠지. 저렇게 훌륭한 분이면 뭔가 다를 거야.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월 200달러의 사용료를 내고 OpenAI의 ChatGPT를 이용한다는 강사님이 음성 대화, 영상 대화, 화면 공유 대화 등을 시도한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들었다. AI에게 핸드폰 카메라로 강의실 장면을 보여 주고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더니 거의 그대로 이야기한다. 카메라로 칠판을 비추고, 수강생들이 칠판의 내용 중 모르는 것을 AI에게 질문하면 답변한다. 난생처음인 것은 어린이도 시니어도 누구에게나 감동을 준다. 잊히지 않고 마음에 남는다. 이번엔 월 200달러의 유료 버전에서만 제공한다는 Deep Research 차례이다. AI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면 그냥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게 아니라, 여러 정보를 짜깁기하고 논리적으로 연결해서 하나의 잘 정리된 보고서처럼 만들어 주는 것을 보여 준다. 자료가 방대하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기다림을 해결하려 했는지 강사님이 수업 중에 어떤 질문을 해도 좋다고 한다. 문제가 생겼다. 멋지게 차려입은 여자분(A) 이 손을 들더니 “선생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는다. 다행히 강사님은 답하지 않는다. 한참 AI에게 질문하고 답하는 사례를 보여 주는데 A가 또 질문한다. “자기 로망이 서빙고동, ㅇㅇ아파트에 사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AI에게 물어봐 달라”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시세가 20억이라고 한다. 강사님은 AI에게 물어보고, 답을 설명한다. ChatGPT가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지 특별한 내용은 없다. 나도 다 아는 내용이다. 조금 후에 A는 자기 아들이 캐나다에 유학하고 있다며 강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질문을 한다. 강의의 맥이 끊어진다. 같이 수업 듣는 수강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다. 강의 내용과 관련한 질문만 받아 달라고 건의하려다 꾹꾹 참았다. 수업 후에 어느 수강생이 강의실을 나가면서 하는 말, “수준이 너무 낮네요.” 나는 수준 이전에 황당함을 느꼈다.


웃는 얼굴이 해맑은 여자가 있었다. 대학원 때 학과 사무실에 같이 근무하던 조교이다. 이분은 가끔 혼자 노래를 부른다. 옆 사람이 들을 정도의 데시벨이다. 싫지 않다. “노래를 잘 부른다”라며 노래 부르는 이유를 물었다. 기분이 나쁘거나,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후 나도 사람답지 않은 행동을 겪거나, 터무니없는,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상황을 만나면 노래를 부른다. 오카리나 연습 중인 노래 텅잉을 하기도 한다. 그 강의 후에 계속 마음이 복잡했다. 덕분에 노래도 많이 불렀다. 그러려니 하며 개의치 말자고 수차례 다독여도 보았다. 그래도 내 안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고민을 한다. 내가 마음을 더 활짝 열고 상대방에게 풍성한 마음을 보여 주면 어떨까? 혹시 바뀔까? 아닐 거야. 쉽지 않아. 강의 중에는 노래도 못 부르고 어떻게 하지? 그것도 남은 12주 동안. 자신이 없다. 즐길 수 없으면 피해야 한다. 반사가 답이다. 수강 신청을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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