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

나, 나, 나

by 레츠고하이

‘예술 인문학’ 강의에서 강사님은 여러 차례 마지막 수업을 강조하신다. 그 시간에 ‘불멸의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얘기할 테니 절대 빠지지 말라고 한다. 드디어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불멸의 진리? 갈망하며 눈과 귀를 세운다. 불멸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선(善)은 반드시 악(惡)을 이긴다’이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 그는 겉으로는 도덕을 중시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체면과 형식에 얽매여 있는 19세기 러시아 상류층의 위선을 폭로하고 비판하고 있다. 체면을 위해 도덕을 이용하는, 남성에게는 관대하고 여성에게 잔혹한,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이중잣대와 위선이 주인공 안나를 파멸로 이끈다는 '불멸의 진리'를 보여준다.

생각해 본다. ‘이중잣대’는 19세기에만, 러시아에서만, 정치권에서만, 남들만 그랬을까? 뉴스거리가 될 정도의 강도는 아니지만, 나 또한 일상에서 수시로 그러고 있다.

오래전 일이다. 삐비빅. 삐비빅. 누군가 도어락 번호를 누른다. 외출했던 아내이다. 잘 다녀왔나요? 물으니, 손에 든 얇은 종이를 가볍게 흔들며 하는 말, “교통 범칙금 통지서가 왔네요. 운전을 어떻게 한 건가요?” 순간, 철저한 원칙주의자라고 자부하는 내가 무너진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럴 리가?” “어디서 그랬지?” 하며 열어 보니, 얼마 전 방문했던 여행지에서 내 차가 직진 차로에서 좌회전하는 사진이 찍혀 있다. 의구심이 들어 담당 경찰관에게 전화하여 “혹시 그 차선이 직진 좌회전 겸용 차로 아닌가요?”라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아도 자기도 확인해 보았는데 그 차로는 직진 차로라고 한다. 좌회전해야 하는 위치에서 직진 차로에 있다가 단속카메라도 안보이니 원칙보다 편의를 앞세웠던 모양이다. 통화가 끝나갈 무렵, 담당 경찰관이 덧붙이는 말, “뒤차 운전자가 블랙박스를 뒤져 고발하였다”라고 한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범칙금을 납부하였다. 그 후 나는 교통법규를 더 철저히 지키며 운전하고 있다.

친구들 1박 2일 여행에 운전 봉사하기로 했다. 간만의 장거리 운전은 부담이다. 천천히 모범 운전하자며 출발했다. 참고로 내 차 크루즈는 1세대이다. 앞 차와의 간격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져도, 자신이 약속한 속도를 고집하며, 꿋꿋하게 전진한다. 브레이크를 밟아 크루즈가 풀리면 다시 설정하여야 한다. 융통성 없는 AI이다.

고속도로를 나와 크루즈를 켜고 한가한 지방 도로 주행선을 달린다. 규정 속도로 주행하는데 앞 차가 너무 늦게 간다. 차 간격이 좁아진다. 브레이크를 밟거나 추월해야 하는 상황이다. 긴 고가도로 위의 차선은 백색실선이다. 차선을 바꾸지 말라는 명령이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순간, 크루즈를 재설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머리를 스친다. 그래도 “브레이크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룸미러를 보았다. 뒤쪽에 차가 보이지 않는다. 고발당할 일이 없다. 차선을 바꾸었다. 차가 채 안정되기도 전에, 조수석에 앉은 친구가 하는 말, “실선에서 차선을 바꾸네.” 내차 안에 뒤차가 있었다. 카메라에 찍힌 것이다. 나는 겸연쩍은 말투로 “크루즈 풀고 재설정하기가 번거로워서”라고 변명하였다. 속으로는 “크루즈 재설정하면 어때서, 좀 더 주행 후에 점선인 곳에서 추월했어야지”라며 나를 다그쳤다.


밤이 내려앉은 여행지에서 친구들과 호수 주변 야경 구경하자며 거리를 나섰다. 차는 가끔 보이고 인적은 없다.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신호등이 빨간불이다. 기다린다. 지루했는지 한 친구가 하는 말, “건너도 되지 않나?” 바로 내가 하는 말, “기다리자. 그게 멋이지.” 다들 내 편이 돼 주었다. 한때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집 주변의 한적한 도로에서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을 촬영하고 그 비율이 얼마인지 따져 본 적이 있다. 지금은 나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바쁜가 보다’ 하며 이해하려 하지만, 그 당시엔 저런 사람들이 없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건데 하며 혀를 끌끌 찼었다.

그날. 절대 뛰지 않는 내가 집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목적지 방향의 횡단보도로 뛰었다. 이럴 땐 꼭 횡단보도 신호마저 발목을 잡는다. 빨간 불이다. 마음이 급하다. 그래도 기다려야지. 긴 숨을 쉬며 둘러보니 어느 쪽에서도 차가 오지 않는다. 흔들린다. 무단 횡단했다. 스스로 위로하는 말, 죄송하지만 제가 무지 바쁩니다.

‘내로남불’은 어찌 보면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사사로운 욕심과 충동, 피곤함과 조급함이 마음을 스치기만 해도 누구나 쉽게 그 문턱을 넘는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돌아보면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게 되고 비로소 인간다움이 나타난다. 우리는 모두 ‘좋은 삶’을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쓰지 않아도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누구나 알고 있다.

요즘 자기 계발을 강조하면서 좋은 삶을 위해 ‘나’를 키우라는 말이 넘친다. 나의 목표, 나의 확신, 나의 권리. 더 나아가 ‘내가 옳아’, 더 나아가 ‘나만 옳아’를 주장하고 있다. 자기애(自己愛)가 넘친다. 모두가 ‘나, 나, 나’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좋은 삶이란, 끝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인간의 본능을 넘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작은 성찰의 연결이 아닐까? 나를 넘어 타인과 함께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인간다움 아닐까?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본능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본능을 넘어선 인간다움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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