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1월의 희로애락

내 마음이 웃는다

by 레츠고하이

손녀가 똑같은 얘기를 반복한다. 겨울방학 중에 스키를 배우고 싶단다.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스키헬멧과 고글을 사주었다. 또 무엇을 했을까? 스키 강사였던 친구에게 손녀의 스키 개인 교습을 부탁하였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운동이다 보니 스키 관련 안전 교육을 확실하게 받게 하고 싶었다. 친구는 스케줄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들네는 1박 2일 일정으로 스키장에 갔다. 첫날 교습 후에 친구가 전화해서 하는 말이 '손녀가 할아버지보다 낫다'고 한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친구는 손녀의 스키 타는 동영상을 보내주었다. 손녀의 작은 몸과 전체적으로 노란색 톤의 스키 장비가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 어색한 발걸음으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초급 슬로프에서, 등을 지고 거꾸로 내려오며 가르치는 친구의 말에 따라 천천히 회전하며 내려오는 손녀의 모습이 대견하다. 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다음 날에는 아들이 동영상을 보내주었다. 친구는 교습 후에 “이번엔 초급에서만 타야 한다”라고 했다는데 중급 정도의 슬로프로 보인다. 신나게 활강하는 모습이 어제와는 완전히 다르다. 손녀의 스키가 눈을 가르는 소리도 들린다. 자신감도 붙었다. 멋있다. 오래간만에 아내와 바짝 붙어 앉아 ‘와와’를 연발하며 핸드폰 화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 맛’이라는 말이 있다.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되는 기쁨. 손녀 덕분에 오랜만에 제대로 된 눈 맛을 보았다. 기쁘다(喜).

은퇴한 지 4년이 지났다. 주변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거의 없다. 혹시라도 그럴 일이 생기면 조금 손해 보면 된다. 싫으면 안 보면 되니 다툴 일도 없다. 그러니 아내 하고만 부딪히지 않으면 화낼 일이 없다. 다행히 나는 그 방법을 안다. 그냥 비우고 또 비우고 내가 지면 된다.

주로 이용하는 지하철의 평일 낮 배차 간격은 13분이다. 아마도 서울지하철 중에 가장 긴 것 같다. 집에서 7분 전에 엘리베이터 호출하고 현관을 나서면 지하철을 탈 수 있다. 10분이면 넉넉하다. 그날 시간을 꼭 지켜야 하는 약속이 있었다. 지하철 앱을 열어 시간표를 확인한다. 최소한 특정 시각의 지하철은 꼭 타야 한다. “미리 준비해야지” 하면서도 이게 쉽지 않다. 아내 도움까지 받아 가며 7분 전에 억지로 준비를 마치고, 엘리베이터 호출 후에 현관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최소한 중간쯤은 올라왔어야 할 엘리베이터가 아직 지하에 있다. 눈이 ‘층 표시기’를 주목한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다 멈추고, 또 멈춘다. 서 있는 시간도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조바심이 솟구친다, 왜 그러지? 누가 장난하나? 그 지하철을 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화가 난다. 바로 아래층에서 누군가 뛰는, 물건 내려놓는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고 문이 열린다. 녹색 끌차와 넥워머를 한 택배 기사가 보인다. 평소 같으면 자연스레 인사를 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쓴다. 엘리베이터에 냉기가 흐른다. 잠시 후 스스로 최면을 걸어 본다. 내 탓이다. 내가 좀 더 서둘러야 했다. 꼭 인사하고 내리자. 화(怒)는 그렇게 지나간다.

입원 4일째 이른 아침, 평소와 달리 아내에게 긴 안부 문자를 보냈다. “잘 잤나요? 밤에 아프지 않았나요? 아침 식사는 한 숟갈이라도, 가능하면 두 숟갈, 반드시 합니다. 운동은 퇴원을 당겨옵니다. 복도라도 자꾸 걸어요. 이따 준비해 갈 것은 없나요?” 반응이 시큰둥하다. “날씨가 추우니 오지 말라”라고 한다. 아내가 좋아하는 단팥빵이랑 단백질 음료랑 사서 병실로 갔다. 아내가 안 보인다. 휴게실에 갔다. 위의 걸개에는 정맥주사 중인 항생제와 수액이 걸려 있고, 아래 받침대에는 복부에서 배출된 빨간 체액이 보이는 드레인 튜브가 올려진 스탠드를 옆에 놓고 아내가 벽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 있다. 창백한 얼굴과 지친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추운데 왜 나와 있냐? 잘 잤나요?”라고 물었다. “다리가 부은 것 같네.”라며 마사지를 해 주었다.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표정이 힘들어 보인다. 안경 너머 눈동자가 흐릿해진다. 흐느낀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보는 눈물이다. 나도 눈물이 난다. 만감이 교차한다. 슬프다(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은퇴했다. 경제 활동은 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많아졌다.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것을 하고 싶었다. 문화예술 관련 공부이다. “보는 것, 듣는 것, 읽는 것보다 하는 게 훨씬 재밌다”라는 말이 있다. 동아리 활동을 3개 하고 있다. 이젠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나는 소박한 음악가이다. 치매 예방 차원에서 10여 년 전에 오카리나 연주를 시작하였다. “한 번 연주해 봐야지”하는 노래가 있으면 악보를 찾아 연습한다. 문제는 어떤 노래든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애를 먹이는 곳이 반드시 있다. 하지만 연습하면 할수록 내가 느끼기에도 연주가 달라진다. 벽을 넘으면 내 마음이 웃는다. 즐겁다. 소박한 꿈이 있다. 예체능의 기본은 발표라고 하는데 아직 제대로 된 공연 기회를 잡지 못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나는 서울 시민대학 시민갤러리 선정 작가이다. 그림 동아리 회원들과 2024년 이른 가을에 전시회를 했다. 적당한 크기의 나무판에 아크릴 물감으로 주로 단청 문양을 그리는데, 집중과 몰입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애를 써서 작품을 완성하면 내 마음이 웃는다. 즐겁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주변에선 수시로 선 긋기 연습을 하라고 조언한다. 묵묵히 나아가면 언젠가는 탁월해지겠지.

나는 글을 쓴다. 한 달에 수필 두 편을 쓰고 있다. 글쓰기의 핵심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남에게 읽힐 준비를 하라고, 겁먹지 말고 들이대라고 하는데 나는 자꾸 감추려고 한다. 그러니 평범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오카리나 연주하기, 그림 그리기에 비해 훨씬 어렵다. 글감을 받으면 자료를 찾고, 구상하고 2주 내내 글쓰기 생각을 한다. 어느 정도 마음이 무르익으면 쓰기 시작한다. 누구처럼 이 과정이 즐거워야 하는데 아직은 스트레스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마무리하고 나면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이 든다. 내 마음이 웃는다. 즐겁다(樂). 부지런히 마음의 빗장을 열다 보면 언젠가는 오롯이 드러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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