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첫 만남(1)

[게이이야기] 우리 이야기.

by 혜성

나와 현재 애인의 첫 만남은 내가 호주에서 돌아온 뒤의 일이다. 당시 입국한 모든 사람들은 2주간 자가격리 기간을 거쳐야 했다. 그때 데이팅 어플로 그에게서 처음 쪽지가 왔다. 당시에 대화하던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그의 프로필 사진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찍은 후줄근한 옆모습에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었다. 외모에 자신감이 있는 편은 아닌 사람 같아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격리기간이 십일이나 남은 상태라는 걸 안 뒤로는 연락이 없어서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격리기간 동안에는 끊임없이 문자와 전화를 해주는 데이빗이라는 미국인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키는 좀 작았고(프로필 상으로), 내가 사는 곳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살았지만, 농담도 잘했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집 밖으로 나가게 되면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제 나중에 만난다. 일상에서는 굉장히 여성적인 끼가 다분한 친구였는데, 침대 위에서는 남성미와 사랑이 넘쳤다.


격리가 끝나는 날, 아침 8시에 일어나자마자 후드를 뒤집어쓰고 나갔다. 번화한 거리를 예상했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조용했다. 군중들 속에서 같이 걸으며 상호작용을 기대했건만 휑한 거리의 피시방 네온사인들만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커피숍을 찾기 위해 걸어 다녔다. 호주에서 아침 8시면 모든 커피숍이 열려 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한국은 아니었다. 대부분 10~11시에 열었고, 그중에서도 다행히 9시에 문을 여는 곳이 있어서 근방에서 20분 정도 방황한 끝에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커피는 잠을 깨기 위해서 마시는 건데 10시쯤 되는 이미 잠에 다 깨 있지 않을까?


커피를 한 모금하면서 몰려오는 손님들의 주문을 혼자 능숙하게 처리하는 바리스타를 본다. 눈이 잔뜩 부은걸 보니 어제 나트륨이 가득한 야식을 먹고 잤나 보다. 손님들은 마치 주문이라도 걸린 듯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난잡하게 잡종화된 메뉴판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해를 포기한 듯 아메리카노를 줄줄이 시킨다. 나는 혹시 크로와상이 있나 메뉴판을 찾았지만 3,500원이라는 가격을 보고 놀란다. 2주 전 만 해도 1달러에 사 먹었는데. 그때 어플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문구가 뜬다.


그 친구였다. 이때까지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아서 잘 몰랐다. 그의 아이디는 앤드류였지만 그게 본명이라는 것은 첫 만남 이후에 알게 됐다. 난 그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는데, 내가 오늘부로 자유인이란 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는 ‘해방된 걸 축하해.’라고 문자를 보냈고 나는 고맙다고 안부인사를 전했다. 난 그전에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냥 상투적으로 오고 간 질문들 뿐이었는데, 출신이나 나이, 직업 그리고 이 지방 도시에는 어떻게 오게 됐는지 정도였고 특이한 건 없었다. 그는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우리 집에서 버스로 10분 되는 거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우린 그날 오후에 잠깐 만나기로 약속했다.


집 안에서 혼자 있어서 데이트든 뭐든 사람을 만나는 게 기뻤다. 금방이라도 비를 토할 것 같은 검은 구름들이 머리 위를 덮고 있긴 했지만 아무렴 어떨까. 습기가 가득한 버스 안에선 오래된 대걸레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와 내 머리를 조여왔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민다. 버스 기사분은 승차하는 할아버지와 마스크 착용 여부로 실랑이를 벌이고, 할아버지는 유난을 피운다면서 젊은 기사를 타박하면서 요금을 내고 기어이 들어와 의자에 앉는다. 거울로 비치는 그의 얼굴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가려졌지만 훤히 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버스는 몇 초간 움직이지 않고 정차해 있었다. 아저씨에게 보내는 암묵적인 협박처럼 느껴졌는데 기분상 꽤 긴 시간이었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약속시간까지 20분이 남았다.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나는 근처를 돌아다니다 약속 장소로 느긋하게 도착했다.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면서 이 장소가 맞는지 확인했다. 시계를 보니 2분 정도 지나있었다. 그가 굉장히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난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내 인내의 한계를 가늠해 본다. 아무래도 15분까지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친구의 경험담이 떠오르는데, 이 주동안 둘 다 시간이 안 맞아서 전화와 메시지만 주고받고 드디어 만나기로 해서 약속 장소로 나갔는데, 집에서 이제 나간다는 문자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두절됐다고 했다. 우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진을 올려놓는 파렴치한 사람이고 그냥 못생긴 얼굴로 대화 자체를 차단당하는 안타까운 인간이라는데 결론을 냈다. 그런 부류의 목적이 뭔지 이해는 가지 않았다. 이 친구도 그런 사람은 아닐까? 나는 편의점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바람맞은 데다 우산 없이 비까지 맞으면 굉장한 에피소드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한 대머리 외국인 한 명이 내 앞에 앉았다. 5분 정도 늦었군.


어색한 목례를 나눴다. 그는 이전까지 만났던 외국인 중에 가장 독특한 외모를 지녔다. 푸른 눈과 갈색머리의 독일계와 영국계 그리고 라틴계를 만나봤지만 이 친구는 달랐다. 콧수염과 창백하다 못해 붉은 핏기가 물든 피부 그리고 민머리는 북유럽의 바이킹을 떠올리게 했다. 민머리인 남자들은 남성호르몬 많아서 정력이 좋다고 하는데 사실일까 문득 궁금했다. 하지만 붉은색 콧수염과 볼 전체에 퍼져있는 주근깨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성적인 끌림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각한 줄 모르는 듯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인상을 살짝 쓰고 있었다. '커피숍 가죠?' 그는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듯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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