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밤으로의 긴 여로 | 유진 오닐

그래도 가족일까

by 민금술사
각자의 고백에서 시작되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고역.

그리고,
환란의 가정사가 위대한 서사가 되는
예술가들의 삶. 작가의 삶.




가족은 때때로

우리가 가장 오래 견뎌야 하는 이야기다.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 Eugene O’Neill (1956)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는 사건이 많은 이야기라기보다, 하루가 길게 늘어지는 이야기다. 아침이 시작되고 대화가 이어지고, 그 대화 속에서 오래 눌러 두었던 말들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그러는 사이 하루는 기울고, 결국 모든 것은 밤으로 내려앉는다.


이 작품의 서사는 격렬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멈춰 있는 듯한 하루 안에서 감정이 조금씩 표면으로 스며 나온다.

누군가 갑자기 죽지도 않고, 운명을 뒤집는 선택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이 숨겨 두었던 말들이 벗겨진다. 변명과 냉소, 원망과 체념, 사랑과 죄책감이 뒤섞인 채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사건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한 집 안에 오래 머물며 그 공기를 견디는 일에 가깝다.


낮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감출 수 있는 힘을 잃는다.

아침에는 넘길 수 있던 말이 오후가 되면 날카로워지고, 저녁이 되면 결국 본심에 가까워진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살아온 사람들.

너무 오래 봐서 오히려 똑바로 보지 못한 사람들.

사랑하기에 더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들.


『밤으로의 긴 여로』는 바로 그 시간을 끝까지 따라간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이 작품의 인물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존재한다.


각자는 각자의 상처를 안고 있고,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 상처를 건드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누군가를 통해 위로받기보다는, 누군가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더 선명하게 보게 되는 관계.


그래서 이 가족은 함께 있으면서도 늘 혼자다.

이 작품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은 어쩌면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를 너무 오래 봐 버린 사람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너무 잘 안다고 믿기 때문에 표현이 거칠어지고,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처가 깊어진다.


사랑이 있어서 상처가 생기기도 하지만,

어쩌면 익숙함이 상처를 더 쉽게 만드는 것일지도.



가족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순간


이 작품을 읽으며 나 역시 가족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은 분명 기쁨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이기도 하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것이 꼭 혈연으로만 정의되는 것일까.


문득 근래의 TV 프로그램들을 떠올리게 된다.


요즘 화면에는 가족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프로그램들이 많다.


문제 아동이나 이혼 위기를 조명하며,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상처를 비교적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긴장, 부부의 균열,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엇갈리는 마음들.


화면 속 가족들은 때로 너무 날것이라 때때로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다. 나아가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엽기적이고, 파괴적인 사건, 사고들까지.


생각해 보면 예전의 TV는 조금 달랐다.


가족은 대체로 따뜻하고 단단한 공동체로 그려졌다.


아이의 손을 잡고 서툴지만 다정하게 캠핑을 떠나는 아버지들이 등장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퀴즈를 풀며, 자식과 손주들의 안부를 묻는 따수운 장면들이 주를 이뤘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가족인가.


가족은 피로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함께 살아온 시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된 시대.


내가 진심으로 인정하는 사람들.

내 곁에서 나를 오래 지켜봐 준 사람들.

혹은 내가 끝내 책임지고 싶어지는 사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가 반복해서 던지듯,

이 질문은 의외로 오래 남는다.



사람에게 지친 시대


지금은 사람에게 지친 시대다.


1인 가구는 늘어나고,

사람들은 결혼과 혈연만으로 관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반려동물과 살고,

누군가는 동거인과 거리를 지켜가며 일상을 함께 한다.


사람 사이의 잔소리와 간섭,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통제와 구속에 많은 사람들이 피곤함을 느낀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과도하게 개입하고,

걱정이라는 명분으로 막아서고,

관심이라는 말로 집착하는 순간들.


가족이라는 말이 때로는 보호가 아니라

간섭의 면허처럼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각자의 자리를 지켜 주어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배우게 된다.



그래도 가족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족이라는 말을 쉽게 버리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


사람에게 지친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묻지 않아도 알아차리는 눈빛.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손.

오래 봐온 사람만이 느끼는 작은 기척.


그런 것들은 여전히 사람 사이에서만 생긴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말을

완전히 포기하기보다

다시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간섭이 아니라 존중으로.

구속이 아니라 자리의 인정으로.


각자의 자리를 지켜 주는 방식으로.



예술가들의 밤


생각해 보면 많은 예술가들의 삶은 이 작품과 닮아 있다.


유진 오닐도 그랬고,

찰리 채플린도 그랬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실제로 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찰리 채플린은 유진 오닐의 사위였다.


가족을 가장 예민하게 해부한 극작가와

인간의 슬픔을 웃음으로 바꾼 영화 예술가.


그 두 사람의 삶이, 어느 순간 같은 가족의 이야기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에 남는다.


예술가들의 삶에는 종종

혼란스럽고 거칠고 견디기 힘든 시간이 있다.


가정은 흔들리고

관계는 무너지고

삶은 길고 긴 밤처럼 이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환란의 가정사는 결국 위대한 서사가 된다.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왜 그렇게 슬픔을 많이 알았던, 또 앓았던 사람이 끝내 웃음을 만들었는지, 한 번쯤 묻고 싶은 밤이라고.



긴 하루 끝에서


『밤으로의 긴 여로』를 덮고 나면, 이 작품이 말하려는 것이 어쩌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가족도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불완전함 속에서

조금씩 상처를 주고,

조금씩 이해하고,

그렇게 함께 늙어 간다.


아침에서 시작된 하루가

결국 밤으로 흘러가듯.


삶도 그렇게 흘러간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서로의 가족으로 남는다.


찰리채플린과 술 한 잔 하고 싶은 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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