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마음 깊은 곳을 울리고 세계관을 뒤흔들며 온몸이 소스라치는 감동을 받지는 않았더라도 등장인물들의 착장이 뇌리를 떠나지 않을 때! 물론 애초에 옷걸이가 다른 것쯤이야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비슷한 분위기의 옷이나 아이템 하나 정도를 구입하거나 영화 스틸컷을 갤러리에 저장해두곤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빈티지와 세컨핸드 소비가 중요한 건 알지만, 패션도 어디까지나 기호와 취향의 문제인데 어떻게 좋지도 않은 걸 입나요?” 하는 사람들이 저절로 빈티지 샵을 들락거리게 만들어 줄 영화들.
이 글을 읽고 영화를 볼 이들을 위해 내용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삼갔으니 모두 안심!
90년대 말 베벌리 힐스의 고등학생 셰어를 주인공으로 하는 하이틴 영화. 전형적인 Y2K 프레피 룩을 보여준다. 체크 투피스에 니삭스 조합, 뷔스티에와 맘 핏 데님, 타탄 체크 원피스에 베레모, 그리고 미니 플리츠 스커트에 곱창 머리끈 등은 지금 홍대 및 합정의 길거리에서도 볼 수 있을 법한 스타일. 알록달록하고 과장된 패션이지만 주인공의 톡톡 튀는 말괄량이 매력으로 완벽히 소화해냈다. 셰어의 패션은 개봉 25년 후 각종 SNS 상에서 ‘유행은 돌고 돈다’라는 말을 증빙하며 빈티지 패션 마니아를 대거 양성하는 중.
클래식 오브 클래식. 블랙 미니 드레스에 진주 귀걸이, 긴 장갑에 선글라스, 한 손에는 베이글 봉지를 들고 보석 가게 앞에서 목걸이를 들여다보는 오드리 헵번의 명장면은 아마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익숙할 것이다. 이 장면이 가장 유명하지만, 영화 내내 주인공의 러블리한 패션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빈티지한 가디건에 원피스, 알록달록한 코트, 핑크 파티 드레스, 그리고 스웻셔츠에 카프리 팬츠를 매치한 홈웨어까지. 하나같이 버릴 것 없는 룩들이다. 빈티지 지방시 아이템을 비롯해 60년대의 하이패션 분위기에 반할 수 있는 영화다. 오드리 헵번의 현실감 없는 미모 또한 이 영화를 꼭 봐야할 이유.
많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오마주 되었던 레옹. 영화 제목은 레옹이지만 더 큰 임팩트는 어린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마틸다가 주지 않았나 싶다. 청부살인업자가 주인공인 퇴폐적인 줄거리와 잘 어울리는 주인공 마틸다의 패션은 미니멀리즘과 힙합, 그리고 절제된 섹시함이라는 90년대의 트렌드를 모두 담고 있다. 숏 비니, 봄버 자켓, 크롭 탑, 짧은 팬츠와 초커 패션은 지금 보아도 쇼핑 욕구를 자극한다.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회자되고 있는 일명 ‘마틸다 패션’은 이제 한국에서도 아이유의 노래 ‘레옹’ 이후로 대명사 격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홍콩의 누벨 바그를 주도한 왕가위 감독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몽환적인 세계관, 그리고 어딘지 불안정한 카메라 워크까지 모든 것이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를 스타일리시하게 만들어준다. 임청하의 블론드 가발에 트렌치코트, 빨간 선글라스에 빨간 매니큐어는 강렬한 캐릭터를 표현하면서 글래머러스하고 관능적인 매력을 뽐낸다. 비교적 따라 해 보기 쉬운 것은 왕페이의 패션. 민낯에 레드 립으로 화장을 하고 슬리브리스 티셔츠나 프린트 셔츠에 넉넉한 바지를 매치했다. 추가로 동그란 프레임의 선글라스를 걸치면 시원한 숏 컷과 더불어 털털하고 청량한 느낌을 준다. 아마 요즈음 돌아온 레트로 유행과 가장 맞닿아 있지 않나 싶다.
누벨 바그를 대표하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아름다운 결혼’. 80년대 파리지앵의 패션과 빈티지하면서도 모던한 로메르의 미장센이 단연 돋보인다. 주인공 사빈의 빈티지한 알록달록 스웨터와 붉은 파이핑 장식이 매력적인 흰색 드레스, 친구 클라리스의 레깅스 패션 … 더불어 클라리스의 작품인 램프와 시계, 남자친구 에드몽이 준 앤티크 커피잔 등은 당장 타임머신을 잡아 80년대 유럽으로 떠나고 싶게 한다. 빈티지 패션과 더불어 빈티지 소품에 대한 사심을 충전해주는 영화.
1950년대 뉴욕의 빈티지한 패션에 눈이 즐거운 영화. 줄거리와 인물의 상관관계를 패션으로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캐롤이 전형적인 상류층 패션을 보여준다면 루니 마라가 연기한 테레즈의 패션은 귀엽고 평범한 소녀 감성 쪽에 가깝다. 붉은 계통의 색을 즐겨 입는 캐롤의 베레모 – 스카프 – 네일 컬러 매치와 그녀의 고급스러운 밍크코트(물론 동물의 털을 입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룩은 누가 보아도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느낌. 반면에 무채색의 소박한 패션을 보여주는 테레즈의 체크무늬 원피스와 헤어밴드는 차분하고 귀여운 느낌을 자아낸다.
마지막은 멘스 웨어 영감이 되어줄, 여름이면 생각나는 일명 ‘콜바넴’. 1980년대 북부 이탈리아 휴양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속 아미 해머와 티모시 샬라메의 패션은 클래식하면서도 이탈리아의 강렬한 햇살을 닮아 알록달록 산뜻하다. 특히 블루 스트라이프 피케 셔츠에 리바이스 청 반바지를 입은 극중 엘리오의 패션은 라코스테 브랜드 캠페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난해한 듯 화려한 프린트 셔츠나 하이넥 스니커즈는 여성들의 쇼핑 욕구도 자극 시켰을 것. 영화 속 나른한 바캉스 분위기와 애틋한 스토리, 이탈리아의 풍경, 그리고 감각적인 OST까지 모든 부분이 빈티지하면서도 세련된 멋스러움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