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야의 첫 번째 레터
봉인 해제!
연아, 구정 연휴가 지나고 첫인사를 할 수 있어서 기뻐! 올해 하고 싶었던 목표가 있다면 꼭 이루고,
무엇보다도 연이의 마음이 평온하면 좋겠다. 다들 어떻게 보냈어?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 수도,
평소와는 조금 다른 연휴를 보낸 연이도 있겠다.
뭐가 됐든 잠깐의 방학이 주어진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 나는 이번 연휴에 이모 댁에 다녀왔는데,
밤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아. 새삼스럽지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가족은 꼭 가까이 있지 않더라도 '우린 서로의 곁에 있다'는 걸 되새겨주는 존재라고.
ㅡ 이런 환대를 타인에게도 베풀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좀 더 살 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ㅡ 방금 막 알게 된 타인을 환대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다만 그 과정에서 오는 번거로움
보다 마음을 여는 일이 훨씬 더 어렵고 중요해. 누군가를 한 번 마음에 들이고 나면 그 이후는 훨씬 수월해진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어. 내가 경험했던 워크숍과 전시 이야기를 오늘 나눌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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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 우연히 신청하게 된 워크숍 <종이 접기와 칩과 무비>를 참석하기 위해 동대문 어딘가로 가던 중이었어. 나는 그때 회사에서 맡은 프로젝트 때문에 고민이 많은 상태였고, 제대로 일하지 못하고 있다는 압박 때문에 한계에 내몰린 기분이라 솔직히 워크숍을 하러 가기 무지 피곤했어. 워크숍 장소를 잘 찾지 못해 지도 앱을 보며 5분쯤 걸었을까, 어떤 건물의 2층 철문에 붙은 '종이 접기와 칩과 무비'라는 쪽지, 그리고 안에서 새어 나오던 따스해 보이는 조명이 아니었다면 뒤돌아 집에 갔을지도 몰라.
거의 마지막 순서로 도착한 곳은 작고 아늑한 사무실이었는데, 조도가 낮지만 따스한 느낌을 주는 조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어. 뻘쭘히 들어선 나를 기획자 희경과 진혁이 반갑게 맞아줬어. 책상 하나를 가운데 두고 몇 사람이 둘러앉아있었어. '프리-프로젝트'란 개념이 낯설어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곧
자연스레 서로 소개하는 시간이 만들어져서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희경의 기획을 들어볼 수 있었어.
* 프리 프로젝트란?
전시 이전에 그 전시를 좀 더 깊게 경험해 보거나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프로그램.
프리(pre) 프로젝트니까, 전시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전시는 시작된 거야.
프리 프로젝트에 대해 더 궁금하다면 �� 큐레이터의 사생활 게시물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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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재개발 2 지구 시행사의 강제 철거에 대비하고 세입자의 처우를 논하는 농성 현장에서 워크숍의 기획자 희경은 비건지향연대인인 자신마저 포용하며 감자칩을 튀겨주시는 가게 상인을 만난다. '본인들의 농성으로 바쁜 사장님들이 어째서 우리 연대인들까지 기꺼이 환영할 수 있는 걸까?' 비건지향인에게 어쩌면 익숙할 배제의 경험은 환대의 경험을 통해 전환점을 맞고, 모두에게 이 경험을 나눠주자는 취지에서 <종이 접기와 칩과 무비>가 탄생했다.
디자이너이자 디자인을 매개로 한 예술·사회 활동가 희경은 젠트리피케이션 농성 현장에서 비건이었던 자신을 챙겨준 사람들 덕분에 음식을 통한 환대의 경험을 했어. 난 한국의 식문화가 비건이나 다양한 형태의 채식주의를 배제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다고 생각하는데, '분위기를 망치기 싫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음식을 먹거나 스스로 자신을 배제한 경험이 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라는 생각이 들었어. 흔히 우리 머릿속에 있는 '농성 현장'은 험상궂은 표정의 사람들이 천막 안에서 추위에
떨며 머리에는 '단결'이나 '투쟁'같은 글자가 적힌 두건을 두른 모습이 생각나잖아. 그런 분위기에서 '채식 지향'이니 '비건'이니 하는 단어들이 유효할리 없을 것 같고. 그런데 희경이 참여한 농성 현장은 그 안에서 그림 그리기 등 다양한 클래스가 매일 열리는 문화 행사에 가까웠대. 이런 행사들이 농성에 지속 가능의 에너지를 만들고 그곳에서 희경의 '비건 지향'이라는 삶의 양식은 농성 현장의 당사자가 내어준 감자칩을 통해 존중받았던 거야.
희경은 이 경험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자 진혁과 함께 전시와 프로그램을 함께 기획하게 됐대.
<종이 접기와 칩과 무비>에서는 농성 현장에서도 쉽게 음식을 담아 먹을 수 있는 종이 용기를 직접 만들어보고, 음식을 넣어 나눠 먹으면서 영화 <러브 레시피>를 봤어. 종이는 희경이 직접 디자인한 도안으로,
옆 사람과 서로 도와가며 겨우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어려운 디자인이었어. 덕분에 자연스럽게 서로
도란도란 얘기하며 어느새 어색함은 사라졌어.
먹으면서 생각한 건데, 감자칩이랑 오이, 사과의 궁합이 이렇게 좋은 줄 처음 알았어!
감자칩이 주는 기름지고 짭짤한 느낌을 채소와 과일이 리프레쉬해 주거든. 연이도 꼭 이렇게 먹어봐,
난 워크숍 이후로 몇 번이나 저 조합으로 먹었어...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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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사람들이 주는 환대의 감각은 이런 거구나. 낯선 이를 배제하지도, 함부로 판단하거나
분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라는 사람을 따스한 시각으로 바라봐주는 것. 그런 사람들과 함께이니,
먹는 행위가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았어. 불편한 자리에 있으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는 거 있잖아. 난 근데 진짜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하나 둘
물꼬를 트기 시작한 대화는 막차 시간이 될 때까지 (!) 이어졌어. 그날은 나한테 좀 힘든 날이었거든.
나에 대한 확신도 잃고, 잘하고 싶은데 따라주지 않는 결과물에 동료를 실망스럽게 만든 날.
근데 워크숍이 끝나고 나니 참 즐거웠다는 기분이 들더라.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고, 여전히 내 '설 자리'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몸은 피곤했지만 참여하길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속상한 마음으로 머리만 복잡한 채 잠들었을 테니 말이야.
워크숍의 과정이 더 궁금한 연이들은 기획자 진혁 님의 유튜브
'큐레이터의 사생활' 채널에서 확인할 수 있어!
그런데 연이야, 이게 전시 <섞어 수프>의 프리-프로젝트 라는 거, 잊으면 안 돼!
왠지 익숙한 화면이지? 맞아, 인스타그램 스토리. 그걸로도 전시를 할 수 있더라고!
인스타그램 스토리 전시라는 거 진짜 재밌지? 큐레이터 진혁 님은 몇 년 전부터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휘발성’과 하이라이트의 ‘영구성’을 둘 다 활용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
“인스타그램 스토리 기능은 24시간 동안만 지속되지만, 우리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기엔 24시간은 너무 짧다”라는 역설을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 작가님들의 일상, 코로나 시대 예술의 역할 등을 스토리를 통해 소개했어. 스토리가 내려간 뒤 모든 장면은 하이라이트로 기록되어 한 폭의 그림처럼 게시되고, @magazine. curator에서 언제든지 관람할 수 있어. 희경 님의 <섞어 수프> 역시, 인스타그램 스토리 전시로 기획되었어. 전시를 소개할 때 가장 고민되는 지점은, '내가 레터를 발행하는 시기와 전시 기간이 동시적인가'인데 온라인, 특히 가장 자주 쉽게 접하는 기기인 휴대폰으로 늘 볼 수 있는 전시라는 점에서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 좋은 것 같아! '전시'는 늘 그때, 그 장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작품들을 내걸고, 기간이 끝나면 휘발되는 매체라는 인식이 있잖아. 그런 인식을 틀을 바꾸는 시도들을 진혁
큐레이터는 늘 해오는 것 같아. 특히, 나는 관람자에게 말을 거는 질문지를 사이사이 끼워 놓았던 게
재밌더라고! <섞어 수프>는 인스타 하이라이트로 여전히 볼 수 있으니까 꼭 살펴봤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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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때때로 영감을 주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질 때도 있지. 메시지가 퍼지기
위해서는 메신저, 혹은 메시지가 강렬해야 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험적으로 체득하게 하는 방법도 있는 것 같아. 어쩌면 체험 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는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게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기도 하니까. 생전 처음 보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간식을 나눠먹고 영화를 보는 경험들은,
내게 아무런 유해한 필터나 경계심 없이 누군가와 교류하게 만든 신비한 체험이었어.
다음에 나도 이런 만남의 장을 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
내가 오늘 준비한 전시 이야기는 여기까지인데, 즐거웠으려나? 나는 재밌었는데,
연이들이 재밌어야 할 텐데... 답장해 줄래? 피드백이 필요해!
그럼 나는 또 재밌는 거 찾아올게! 다음 주 김러브의 두 번째 레터도 기대해 주라.
조만간 또 만나! 바이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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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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