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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터어리 May 19. 2024

사랑은 우연을 타고.

주영화의 첫 번째 레터



연아 안녕!



 



  설 연휴를 앞두고 내 일기를 처음 보여주게 됐네. 놀 준비는 잘 돼가? 나는 연휴 동안 고향에 내려가서 모처럼 아무 생각 없이 푹 쉴 거야. 요즘 <환승연애 1>을 정주행 하고 있는데 너무 재밌는 거 있지. 

그거 다 보면 휴일도 후딱 지나갈 것 같네. 그러면 또다시 수요일이 찾아올 거고! 그때까지 너도 마음 편히 푹 쉬었으면 좋겠다 :)







#

 다들 사랑하고 있니? 나는 한때 ‘사랑이 뭘까?’ 고민하면서 많은 세월을 보냈어. 마치 ‘인생은 뭘까?’ 

고민하듯이. 최근에는 생각을 달리해보기로 했어. 그러니까 질문의 순서를 바꿔보는 거지. ‘사랑이 뭘까’ 묻는 것이 아니라 ‘뭐가 사랑일까’ 묻기로 한 거야. 전자는 모호하고 답이 없어. 고민하는 사람의 진을 

다 빼놓아. 자칫 이론 없는 관념으로 빠져서 망상으로 이어지기 십상이야.




  반면 후자는 답이 있어. 정확히 말하면 답으로 향하는 각자의 길이 명확해. 무엇이 사랑일까? 

우리 시선이 자꾸 닿는 것. 내가 너를 자꾸만 떠올리는 것. 네 이름과 취미가,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이 

궁금해지는 것. 너와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속상해하는 것. 낯가리는 나를 조바심 나게 하고, 결국 

먼저 다가가 데이트 신청하게 만드는 것. 이 모든 답은 달콤하고 때로 씁쓸하지만 아무튼 확실한 감각을 

선사해. 공상보다 나은 것 같아.




♫•*¨*•.¸¸♪✧




  얼마 전 극장에서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봤어. ‘헬싱키 X 빈티지 X 로맨스'라는 카피가 인상적이더라고. "프롤레타리아 로맨스"라며 별점 9점을 준 임수연 평론가의 한 줄 평도 마음에 들었어. 무엇보다 요즘 내게 몽글몽글한 로맨스 영화가 필요했거든. 연이 너도 그럴 때 있지 않아? 드라마로 보기에는 서사가 

버겁고, 책으로 읽기에는 시각적 자극이 부족할 때. 딱 내 마음 하나 따듯하게 데워 줄 작고 두근거리는 

감각을 찾기 위해 홀린 듯 이 영화를 선택했지. 아주 성공적이었다는 것만 미리 말해둘게.




  식료품 매장에서 일하는 안사와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홀라파는 직장동료의 채근에 지친 몸을 이끌고 

가라오케로 향해. 심신은 노동으로 고갈돼서 두 사람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어, 서로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뭐가 사랑일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겠지. 남자 둘 여자 둘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우연히 접점이 생겼는데, 하필 안사와 홀라파가 서로 의식하기 시작한 거야. 첫 응시로 상대를 인지하고, 두 번 만에 호기심이 생기고, 세 번째부터는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만으로도 두 불이 빨개질 만큼 쑥스러움을 느끼게 돼. 그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그날 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는 묘사는 굳이 필요 없을 만큼 기적같이 서로에게 끌리게 됐어.




  그렇게 순탄한 연애가 시작할 거라 기대했다면 오산이야. 이 영화는 주인공들을 아주 집요하게 괴롭히거든.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잃어버리거나,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기차에 치이는 불가항력적 사건으로 

인해 둘 사이는 자꾸 멀어져. 말도 안 된다며 화내기 전에 곰곰 생각해 보니, 우리 삶에 우연이 아닌 것이 없더라. 이걸 증명하듯 영화에 등장하는 라디오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양상을 계속해서 보도해. 

그러다가 다른 채널로 돌리면 이내 아름다운 사랑 노래가 흘러나오지. 전쟁 같은 불가항력적 사건과 우연처럼 다가온 인연 사이를 아슬하게 외줄 타기 하며 우리는 살아오고 있었던 거야.




  세상에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나.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어처구니없는 우연에 열이 받기도 해. 안사도 첫 식사 자리에서 라디오를 끄며 ‘망할 전쟁!’이라며 화내더라고. 하지만 우리를 돕는 우연도 있어.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고, 그의 친구를 만나 소식을 듣고, 평생 함께할 반려견을 만나고, 너와 나와 강아지가 이제 겨우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되지. 

참으로 사랑스러운 우연의 마법이야.




♫•*¨*•.¸¸♪✧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랑이 무엇인지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하지 말고 온갖 우연에 직접 부딪히며 끈질기게 인연을 붙잡아 나가라는 거야. 큰 파도에 몸을 맡기고 때로는 버티면서 때로는 흘리면서 서핑하듯, 

삶에 밀려드는 우연의 파도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서퍼가 되는 거지. 너는 어때? 백사장에 가만히 앉아 

밀물만 피하고 있니? 아니면 지금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있니?




  연이 너한테 처음 보내는 글이라 조금 떨린다. 앞으로도 재밌게 본 영화가 뭔지 너랑 소소하게 얘기 

나누고 싶어. 너도 좋은 영화 보면 추천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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