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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터어리 May 17. 2024

출발선 뒤의 우리들.

김러브의 첫 번째 레터



봉인 해제! 





  연아, 드디어 첫번째 레터어리가 도착했어. 

네게 보내는 첫 편지이자 첫 일기. 정말 떨린다! 레터어리라는 낯선 말이 언젠간 네 입에 꼭 익기를 

바라며. 많이 기대해주고, 레터어리 돌려줄 땐 자물쇠 잘 잠그는 것 잊지마! 그럼 시작할게.


#

  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새해 인사가 겸연쩍어질 정도로 시간이 흘렀겠지만. 

새해 카운트다운은 잘했어? 난 12월 31일에 혼자 자취방에서 잠들었는데 눈 떠보니 이미 1월 1일이 

두 시간 정도 지나있더라고. 휴대폰에 온 몇 개의 새해 인사 말고는 나에게 새로운 해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장치들이 전혀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올해부터는 새해라고 나이 한 살 더 먹지도 않아서 

그런 건지, 예전만큼 설레고 부푸는 마음은 없는 것 같아.



   혹시 그런 기분 알아? 시작하는 게 너무 무서워서 움직일 수조차 없는, 경계선이 희미한 출발선에 족쇄로 묶여있는 기분 말이야. 견문해 보지 못한 세계는 점점 늘어나고, 가만히 있으면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그저 나이가 들어갈 뿐인데, 나는 그 넓은 바깥으로 한 발짝 움직이는 것도 힘겹게 느껴지기만 해. 

나는 내가 정말 즐거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무적의 변명 아래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해보았지. 

물론 후회는 없어. 그렇지만 그 일련의 경험들이 전문성도 없고 연속성도 없어서, 세상에서는 그냥 낭비한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렇게 어떤 길을 걷다가 여기서는 정착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을 때. 그래서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 방향을 틀어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때. 그러나 가끔 내가 발을 처음 내딛고 있는 이 출발선조차 제대로 된 것인지 의문스러울 때. 내가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은 ‘초조함’이었어.



   오늘은, 그 초조하고 두려웠던 수많은 밤들을 이겨낼 수 있게 도움이 되어준 책을 소개할까 해. 바로 

박참새의 ‘출발선 뒤의 초조함’이야. 이 책을 왜 샀는지 알겠어? 맞아. 제목 때문이야. 나 사실 너무 초조했거든. 이 책은 김겨울, 이승희, 정지혜, 이슬아 네 명의 여성 창작자가 박참새와 나눈 대담을 엮은 대담집이야. 네 명의 창작자 중 절반은 이름도 모르고 절반은 이름만 겨우 알면서, 사실 이들과의 대담 내용이 

그리 궁금하지 않았음에도,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샀다니까. 내가 얼마나 초조했는지 감이 오니 ㅋㅋㅋ.



   최근에 널 초조하고 두렵게 했던 건 뭐였어? 나는 글쓰기에 대한 욕심이었던 것 같아.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하지만, 실은 남들에게 선뜻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글은 없어. 언젠가 누군가에게 내 글을 보여줘야 되는 순간에는 진짜 너무너무 무섭고 창피해서 콱 죽어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 가끔 수준 높은, 무척 훌륭한 글을 읽으면 짧은 경탄 뒤 곧바로 몰려오는 좌절감이 나를 덮치곤 했지. 내가 이 경지에 가닿을 수 있을지 생각하면 막막해서 한 줄기 빛조차 없고 파도 소리만 들리는 난바다의 뗏목 위에 있는 기분이 들었거든. 그때, 내게 굵은 줄기의 빛이 되어준 담화가 있어. 궁금하지? 짧게 소개할게.



참새

그런데 아까 말씀해 주신 것처럼, 창작의 완성은 노출이잖아요. 하지만 세상에 나의 것을 내보이는 일에는 만드는 것과 별개로 엄청난 용기와 대범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나를 드러내 보이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겨울

저는 딱 두 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과 내가 별로라는 인정. (중략)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별로라는 걸 인정하면 발전이 없을 수도 있어요. 더 발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또 공개를 못해서는 안되거든요. 그냥 인정해야 해요. (중략) 지금은 이게 최선이지만,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라고 믿는 거죠. 더 잘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이렇게 두 가지 마음이 있다면 조금 더 대범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이런 내 성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 네가 이렇게 잘하고 싶어서 예민해하는 건 일종의 재능이야.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마음,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 이 감정은 모두 재능이니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어. 다만, 더 대범해지기로 결심한 거지. ‘지금은’ 이게 내 최선이지만, 앞으로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 그럴 수 있다는 믿음. 내게는 그 한 조각의 용기가 필요했던 거야.



   이 책, 매끄럽게 다듬어진 대담집이라 물 흐르듯 읽게 되거든.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어? 내가 진짜 잘 읽은 거 맞나?’ 할 수도 있어. 그런데 여기 나온 진솔한 얘기들은 내가 일상을 살면서 수도 없이 ‘나 못해!’ 하고 꼬르륵 물 안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툭, 툭, 튀어 올라서 힘을 주고 다시 사라지더라고 ㅋㅋㅋ.



   지난해, 기쁜 일과 슬픈 일, 이룬 일과 닿지 못한 일들, 다 많았겠지만. 짊어진 것이 무거우면 이걸 메고 떠나야 할 여정길이 무서워지잖아. 그럼 결국 출발선 뒤에서 주저하며 멈춰있게 되고.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 다 훌훌 털어버리고 가뿐하게 맞이하는 새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 2024년 새로운 출발선 뒤에 서게 될 여니를 응원하며. 우리, 오래오래 보자!



P.S. 나도 이런 대담집을 만들고 싶어졌어. 내가 언젠가 꼭 너와 나눈 대담을 책으로 엮고 싶다는 생각하는 중. 그러니까 그 대담집을 누군가는 돈 주고 살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멋진 사람이 되자(ㅋㅋㅋ). 

종이값 되게 비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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