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야의 열 번째 레터
'처서 매직'이라는 말 진짜인가 봐. 신기하게도 오늘 온도가 성큼 내려간 게 느껴지더라. 우리 집은 꽤 높은 언덕에 있는데, 걸어 올라올 때 평소처럼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덥진 않더라고? 할 말 없을 때 날씨 얘기를 하라고 하던데 내가 연이한테 할 말이 없어서 날씨 얘기로 늘 시작하는 건 아니고. 진짜 신기해서 그래. 나는 여름보다 가을 겨울옷이 훨씬 많아서 빨리 더 추워졌으면 좋겠어. 티셔츠랑 바지 몇 벌 돌려 입는 게 지겹거든.
한 번쯤은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서 아무것도 넣고싶지 않을 때가 연이도 있지? 요즘의 내가 꼭 그랬어. 아니다, 요즘이 아니라 올해 내내 그랬어. 지하철 타고 이동할 때 꼭 뭔가를 시청하던 내가 (보통은 미드 시리즈) 가볍게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고, 긴 영상이 싫어서 쇼츠 위주로 보게 되고 나중에는 쇼츠와 릴스만 돌아가며 보고 있더라니까. 흔히들 말하는 '도파민 중독'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냐. 나는 시리즈나 영화를 볼 때 이입을 잘하는데, 이입에도 에너지가 쓰이잖아. 평소에 빠져나가는 에너지가 많으니 뭔가에 집중하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피곤했던 것 같아. 집중하면 이입하게 되고, 이입하면 감정이 동요된다든지 에너지가 소모되니까.
하지만 확실히 느끼긴 했어, 쇼츠나 짧은 콘텐츠를 보는 게 여러모로 안 좋다는 거 말야. 집중력도 예전 같지 않고, 내 안의 인내심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이대로면 완전히 도파민에 절여져 자극성 콘텐츠만 보는 인간이 될까 봐 불안했어. 열심히 전시를 보러 다녔던 것도 내 안의 썩어 문드러진 뇌세포를 좀 씻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어. 러닝 타임이 기본 2시간은 소요되는 영화는 더욱이 보기 싫었고, 책을 펴면 졸음이 쏟아졌어.
다행히 최근에는 다시 몰입하는 것이 즐겁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정확히는 저번 레터에서 소개했던 <까마귀 기르기>를 보고 난 뒤 였던 것 같아. 이 즐거움이 내 안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동안 미뤄왔던 것들을 가리지 않고 보기 시작했고, 지금은 동시에 여러 개를 보는 중이야. 오늘의 레터는 그래서 '요즘 빠져있는 것들'이야. 내가 재밌게 보고 있는 콘텐츠들을 소개할게!
[도서] - <파과>, 지은이 구병모
"바닥을 구르는 마른 낙엽 같은 인간들이라도 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서 상대해. 자꾸 얕봐가면서 식은 죽 먹기라고 팔랑팔랑 덤비다간 쓰지 않은 힘의 양만큼 너에게 되돌아올 테니까."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실로 오랜만에 집어 든 소설이야. 소설을 읽지 않은지 정말 오래됐거든. 구병모 작가의 책은 <위저드 베이커리>를 오래 전에 읽은게 다인데, <파과>를 읽으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묘한 경계에 있는 이야기로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작가라는걸 다시금 느꼈어.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되어가는 청부살인업자 '조각'의 내면에서 시작된 작은 일렁임이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되어 삶을 흔들기 시작한다는 내용이야. 어딘지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는 구병모 작가의 문체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갈 만큼 읽는 데 막힘이 없어. 지하철처럼 소음이 있고 흔들리는 곳에서도 큰 노력 없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 영화화되었다는 소식이 (주연은 무려 이혜영 배우!) 있으니 흥미로운 장르 소설을 찾는 연이에게 추천할게.
[애니메이션/만화] - <원피스>, 지은이 오다 에이치로
"지배 같은 건 안 해,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녀석이 해적왕이다! "
내가 <원피스>를 좋아한다고 하면 대개 반응이 3가지 정도로 갈리곤 해. 하나는 '뭐야, 너 그런 일본 애니 좋아했었나?', 다른 하나는 '원피스 그거 아직도 안 끝났냐', 마지막으로 '히익 너도?!?!' 정도인데 마지막은 자주 본 적 없는 것 같아. (혹시 연이 중에 있으면 나랑 원피스 얘기할래? 당장 답장 써)
나는 중학생 때부터 <원피스>를 좋아했는데, 보기 시작한지 15년을 훌쩍 넘기는 동안 루피는 모험을 하고 있는 거지. 밀렸던 단행본을 몰아보고, 애니메이션도 동시에 보고 있어. 어릴 땐 그저 재밌어서 좋아했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루피의 태도를 존경하게 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계산 없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무엇이든 시작 전에 '가능성'을 타진해 보거나 두려움이 앞서는 나와 비교되거든. 열혈소년만화의 매력은 그런게 아닐까, 목표를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루피를 보면 응원할수밖에 없게 돼. 유치하다고? 제대로 읽기 시작하면 그런 말 못할 걸.
[영화] - <에이리언> 시리즈
최근에 <에이리언: 로물루스>가 개봉하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에이리언 시리즈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어. <에이리언>시리즈는 각 영화마다 감독들의 개성이 진하게 묻어나와서 주인공만 빼면 전혀 다른 영화처럼 보이기도 해. 내가 가장 좋았던 건 1987년 개봉한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오리지널이었어.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보니 다른 영화들에 비해 적은 예산임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생명체인 에이리언이 주는 공포를 아주 탁월하게 표현했거든.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 '리플리'는 이전까지 할리우드 영화에 존재했던 여성 캐릭터의 피해자성이나 모성을 탈피하고 냉철한 원칙주의자로서 끝까지 생존하게 돼. 감독 리들리 스콧은 에이리언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른 영화인 <프로메테우스>도 연출했는데,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와 숭고가 동시에 느껴지는 영화 미술 또한 관건이야. 스페이스 호러 장르를 만끽하고 싶은 연이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야.
[전시] - <바자전>
《바자전: UNDER/STAND》
용산구 우사단로 42
기간 8.23-9.14
무료 전시
인스타그램에서 우스꽝스러운 광고를 통해 알게 된 전시야. 패션 매거진 '하퍼스 바자'에서 주최하는 현대 미술 전시로, 이해하다 라는 의미인 'Understand'에서 'Under'와 'Stand' 를 각각 분리한다는 테마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을 이끌어가는 4인의 작가전을 선보였어.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인 이형구 작가의 작품이나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작업을 이어가는 해외 작가 '마뉴엘 솔라노'의 작품이 인상적이었어. 전시는 9월 14일까지로 2주가량 넉넉히 남아있으니, 관심 있는 연이들은 링크 참고해서 다녀와도 좋을 것 같아!
[시리즈] - <더 베어>
<더 베어>시리즈의 주인공 카르멘은 형의 자살과 개인적인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병적으로 일에 집착하는 남자야. 그에게 식당 운영과 요리를 하는 것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라 그의 일상이자 삶 그 자체지. 그 일상이 카르멘을 집어삼켜 PTSD를 회복할 틈조차 주지 않음에도 그는 어떻게든 식당을 운영해야만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 <더 베어>의 주방은 혼돈과 악다구니가 비빔밥 처럼 비벼진 지옥이야. 그게 한낱 테이크아웃 전문점이든, 미슐랭 3스타짜리 고급 레스토랑이든 상관 없이, 지옥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일과 자신을 억지로 혼연일체 시키려는 이 주방의 인물들은 각자가 지닌 아픔이나 현실이 있고, 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더욱 주방에 갇혀 일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여. 마치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벗어날지 모른다는 듯이.
이 시리즈의 묘미는 이런 미친 지옥의 민낯을 시청자에게 가감없이 전달한다는 거야. 내가 드라마를 보고있는지, 아니면 저 아수라장에서 함께 혼란에 빠져있는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복잡한 동선과 편집과 악쓰는 소리는 혼을 쏙 빼버려. 그러다 곧 알게돼. 그 혼란한 틈 사이에도 규칙과 관계와 이해가 있고, 그것들이 이 사람들을 지탱해 준다는 걸.
아직까진 이 모든 게 즐거운데,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기도 해. 어제 만났던 친구는 내가 '육각형 인간'이 되려 한다더라고. 육각형 인간이 될 수 없다는건 나 자신이 가장 잘 알아. 나의 템포를 조절하고 무리하지 않다 보면 콘텐츠 소비의 즐거움을 계속 유지하는 방법을 찾을지도 몰라. 꾸준히 연이에게 즐거운 것들을 소개하는 다야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만 줄일게. 나 때문에 위에 언급한 것들을 보게 된다면 너무 뿌듯할듯... 그런 연이가 있다면 답장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