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리스트의 과학 이야기 8.
윤종빈 감독의 2018년 영화, '공작'을 보면요.
'호연지기'라는 사자성어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작중인물 박석영(황정민)의 배짱 넘치는 말과 행동을 보고 리처장(이성민)이 이 말을 여러 차례 하지요.
'근래 보기 드문 호연지기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호연지기 (浩然之氣),
문자 그대로 풀면 '세상에 존재하는 큰 기운' 정도의 뜻인데요.
보통은 이제 배짱 넘치고 그릇이 큰 사람을 보고 '호연지기가 있는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길 하지요.
제가 갑자기 이 호연지기란 사자성어를 꺼낸 이유는요.
오늘 제가 말씀드릴 인물이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 중에서 가장 호연지기가 넘쳤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호연지기란 말이 맨 처음 만들어진 곳이 그리스가 아닌 중국이지만,
그리고 이 말의 창시자인 맹자는 오늘 이야기해 드릴 이 분보다 한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난 후대의 인물이긴 하지만.
그래서 호연지기란 말을 이 분에게 쓰는 게 좀 웃긴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이 분을 이렇게 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호연지기 그 자체, '데모크리토스'라고 말이죠.
데모크리토스는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다'는 단 한 문장으로 많은 그리스인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파르메니데스가 사망하고 20년쯤 뒤에, 그리스의 압데라라는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다른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데모크리토스 역시 있는 집안의 금수저 자제였죠. 태어나고 잘 컸을 뿐인데 굉장히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돈도 넘쳐나고 타고난 기개는 더 넘쳐나고, 데모크리토스는 그리스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세계 곳곳을 여행했죠.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긴 하는데 이 시대의 이야기라는 건 후대 사람들이 양념을 잔뜩 쳐댄 경우도 있어서 신빙성이 조금은 떨어지거든요. 그래도 어쨌든 많은 곳을 여행했던 건 맞습니다.)
데모크리토스가 기원전 5세기의 인물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사실 내가 막 초재벌이 아니더라도 웬만하면 외국 여행 한 번 정도는 갈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하지만 저때는 이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외국은 고사하고 평생 태어난 동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했던 시대가 바로 저 시대였죠. 그리고 이게 꼭 돈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저 시대에 외국에 간다는 건 목숨을 건 대단한 모험을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거든요. (아마 요즘으로 치면 우주여행을 셀프로 가는 것과 비슷한 정도일 겁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여행에서 더 대단했던 것은요. 데모크리토스가 물려받은 모든 유산을 여행 경비로 싸그리 써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 여행을 마치고 그리스로 돌아왔을 때, 데모크리토스는 빈털터리였죠.
하지만 그깟 텅 빈 잔고 따위, 인간 호연지기 데모크리토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에 돌아온 데모크리토스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낭독했죠. 책은 무척 큰 인기를 끌었고 데모크리토스는 책 낭독회 등을 통해 큰돈을 벌었습니다. 여행으로 탕진해 버린 물려받은 유산의 5배가 넘는 돈을 벌었죠.
그러니까 데모크리토스는 어떻게 보면 당시 서양 문명 최고의 탑티어 여행 유튜버였던 겁니다.
이렇듯 이래저래 비범한 인물이었던 기개 넘치는 데모크리토스는요.
라이프 스타일뿐 아니라 ‘생각하는 스타일’ 역시 남들과는 달랐습니다.
생각 역시 굉장히 시원시원하게 그 그릇부터가 달랐죠.
그리고 그의 시원시원한 생각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과 여러분과 저)을 복장 터지게 했던 요주의 인물, '파르메니데스’의 언어폭력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다"
by 파르메니데스
이 당연해 보이는 말 한마디에 끄덕인 죄로 파르메니데스의 폭력적인 논리를 그저 듣고 있어야만 했던 그리스인들(과 여러분과 저)은요.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이상하다 생각은 하면서도 그 현란하고 괴팍한 논리에 당황한 나머지 딱히 어떤 반론을 잘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 저거 분명 아닌 것 같은데...뭐지...아 근데 쟤 말은 또 왜케 잘하냐...아...뭐라고 반박을 하지...?'
하지만 데모크리토스는 이런 어버버의 시간에 동참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죠.
데모크리토스는 파르메니데스의 이야기에 전혀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이야기를 들은 데모크리토스는 그냥 아주 심플하게 생각하고 고민을 끝내버렸죠.
있는 건 있다고? 오케이, 이건 맞지.
없는 건 없다고? 음...? 왜??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는 거 아냐??ㅋㅋ
인간 호연지기, 데모크리토스는요. 파르메니데스 이야기의 중간 이후 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곧바로 저 이야기의 첫 부분을 때려 고쳐버렸습니다.
‘있는 건 있다. 없는 건 없다.’가 아니라
있는 건 있다. 그리고 없는 것도 있다.
이렇게 말입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이어서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계속 두들겨 패기 시작했죠.
'텅 빈 공간'이란 건 우리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개념이라고 현란하게 이야기했던 파르메니데스의 주장 역시 데모크리토스는 매우 쿨하게 씹고 넘겨버렸습니다.
빈 공간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거라고? 왜 못함?ㅋㅋㅋ 텅 비었으면 텅 빈 거지 뭔 소리여 저게ㅋㅋ
네, 그야말로 호연지기란 것을 폭발시키는 데모크리토스였습니다.
물론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해 보면요.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을 쿨하게 씹어버린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 때는 기원전 5세기, 지금과는 정말 많은 게 다른 때였죠.
지금은 우리가 나름 과학 지식도 많이 알고 그렇지만 저 시대의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지구가 둥근 게 맞긴 맞냐?' 라는 이야기부터가 진지한 고민거리인 시대였으니까요.
또,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논리를 꽤나 중요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암만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제대로 이걸 반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던 그런 시대였지요.
그런데 그런 시대에
"응? 없는 게 왜 없어? 아무것도 없으면 없는 거고 빈 거지 뭐. 봐. 여기 상자 안에 암것도 없지? 그럼 없는 거야. 그럼 얘기 끝! 오케이?" 라고 이야기하는 데모크리토스의 등장은 매우 신선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데모크리토스는 그렇게 복장 터지고 지지부진했던 파르메니데스의 늪에서 그리스 사람들을 건져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데모크리토스는 드디어, 자신의 후대 과학자들을 2000년 넘게 끙끙 앓게 할 위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시작했죠.
'인류 문명이 싹 다 망해서 오직 하나의 지식만 후대에 전할 수 있다면 어떤 지식을 전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파인만의 답,
바로 ‘원자’라는 아이디어를 데모크리토스는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레터리스트의 과학 이야기 9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