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집 근처 당산역 부근에 사무실을 구했다.
나 홀로 쓰는 사무실이 아닌 모르는 이 여럿과 적당히 함께 사용하는 그런 이른바 ‘공유 사무실’을 구한 것은 순전히 내가 지금 당장 벌고 있는 돈이 변변치 않아서였을 뿐, 그 외의 이유는 없었다.
돈이 별로 없으니 자리는 영 궁색하다.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끝.
어쨌든 그렇게 방 한 칸도 아닌 책상과 의자 하나를 겨우 구하긴 했는데 사실 이건 꼭 집 밖에서 해야만 하는 엄청나게 그럴싸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곳 공유 사무실의 자리 한 켠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이런저런 개인적인 글을 생각날 때마다 적당히 꺼내어 써보는 일, 그리고 출판사 시절 퍽 고맙게 연을 맺은 옛 상사의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으로 엉겁결에 맡게 된 한 단행본의 편집 일. 이 정도인데 사실 이 일들은 모두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돈을 들여 사무실(사실은 ‘실’이 아니라 자리 하나일 뿐인데 사무실이란 단어를 계속 써야 하는 것이 조금 불만스럽긴 하지만 당장은 떠오르는 적합한 단어가 없다)을 구한 것은 집이라는 공간에는 사람을 그 뿌리 끝까지 늘어지게 만드는 그런 속성이 있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깊이 체감했기 때문이다. 조금 늦게 일어나도, 조금 후줄근하게 입어도, 심지어 아주 때로는 씻지조차 않아도, 아무리 그러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편안한 늘어짐. 집이라는 공간은 가장 편한 공간이기에 때론 이런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그렇게 출근(이 용어 역시 프리랜서인 내겐 썩 들어맞는 것 같지 않다)을 한 지도 어느덧 벌써 일주일째다. 주말에도 빼놓지 않고 잠시나마 출근을 하긴 했으니 난 오늘로써 꼭 ‘일곱 번’ 이 당산역 사무실에 출근을 한 셈인데 그 일곱 날 동안 나는 딱 일곱 번 당산역 KFC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그러니까 매일 KFC의 치킨버거를 먹었다는 이야기다.
KFC.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미국의 주(州)인데 면적은 대충 남한 정도, 인구는 그렇게 많진 않고 대충 450만 명 정도. 치킨과 버번 위스키가 유명한 지역. 도심지보다는 한산한 교외 느낌의 지역. 내가 켄터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대략 이 정도이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대단한 일 아닌가. 저 먼 미국의 한산한 교외 지역에서 시작된 음식 하나를 이렇게 한국, 그중에서도 당산역에서 먹을 수 있다니 말이다. 우리식으로 러프하게 치환해 말해보자면 대략 '파주 참게 튀김' 정도의 느낌일까? 켄터키는커녕 미국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내가 주 7일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고 있는 것처럼 파주는커녕 한국 근처에도 와보지 않은, 예를 들어 뭐 헝가리의 누군가가 파주 참게 튀김이란 걸 부다페스트의 한 역 근처에서 매일 먹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비록 내가 파주 출신은 아니지만 이 얼마나 뿌듯한 모습이겠냐 말이다.
아무튼, 난 KFC를 참 좋아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타워버거를 참으로 좋아하는데 이 타워버거란 것은 내겐 꽤나 의미가 있는 그런 음식이다. 왜냐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음 이 음식을 먹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목동 6단지, 이대목동병원과 한가람고등학교 사이에 있는 학원가. 그곳에 있는 수학학원인 원일학원 (검색해 보니 아직도 학원이 그대로 있다. 이 역시 대단한 일이다). 그곳이 바로 내가 타워버거를 처음 만난 곳이다. 원일학원에 다니던 어느 날, 학원 선생님이 사 오신 묵직한 KFC 비닐 봉다리 안에는 당시 이제 막 출시됐던 그 ‘타워버거’가 잔뜩 들어있었고 나와 친구들은 모두 그 폭력적인 맛에 초등학생답게 환호를 했더랬다.
그 후로 지금까지 무려 24년.
난 이 24년 동안 KFC에서 다른 버거를 먹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맥도날드나 버거킹, 롯데리아에서도 물론 주력으로 시켜 먹는 버거가 있긴 했으나 종종 새 버거도 먹어보곤 했었는데 유독 이 KFC에서만큼은 그래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직 타워버거, 지독한 외길 24년이었다.
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에지간해선 새로운 무언가에 좀체 도전하지 않는 나의 보수적인 성질머리 때문이었을까?
원일학원 강의실에서 맛보았던 첫 타워버거의 맛이 강렬해도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타워버거야말로 정말 내 입맛에 딱 맞춤으로 잘 맞는 그런 스킨핏스러운 버거이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난 24년 동안 그렇게 묵묵히, 타워버거 외길만을 걸어왔다. 내가 이곳, 당산역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한 딱 일주일 전까지는 말이다.
딱 일주일 전, 그러니까 11월 13일.
24년짜리 탑(공든 탑은 아니다. KFC에서는 고민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은 바로 이 날,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무너져버렸다.
이건 또 왜였을까? 왜 나는 갑자기 타워버거가 아닌 새로운 메뉴, 징거버거를 먹었을까?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징거버거는 실망스러웠다. 최소 24년 이상 된 기억이라 확실한 건 아니지만 분명 옛날의 징거버거에는 토마토가 있었던 것 같은데 토마토가 없었고 그렇기에 그건 '참으로 대단한 KFC'의 버거라기엔 부족한, 그저 그런 치킨버거일 뿐이었다.
다음 날, 메뉴판에서 발견한 트위스터는 참으로 반가웠다. ‘아, 그래 이게 있었지. 맥도날드 스낵랩 이전에 원래 이게 있었어..!’ 라는 조금은 미안한 감상은 ‘아 근데 스낵랩이 더 낫네’ 라는 생각이 들자 이내 사라졌고 그렇게 나는 이틀 연속 썩 만족스럽지 못한 점심 식사를 했더랬다.
그다음 날에 만난 커넬 뭐시기 버거는 요즘 KFC 측에서 한창 열심히 미는 버거인 듯한데 개인적으로는 편의점 치킨버거만도 못한 졸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만들 거면 그냥 적당한 다른 이름을 붙일 것이지, 고인이신 창립자의 이름을 꼭 이 버거에 붙여야만 했을까? 이건 윤리적으로도 영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3일 연속, 그렇게 내 점심 식사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나는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역시 같은 KFC에 가서 같은 자리에 앉아 점심 식사를 했다. 커넬 뭐시기 버거 이후로 나는 원래의 나로 되돌아왔다. 만족스럽지 못하게 식사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나지만 지난 세 번의 실패와 그로 인한 속상함은 24년 타워 외길에서 스스로 탈선한 자가 감수해야 마땅한 패널티라 생각하며 다시금 타워 버거를 주문해 먹었고 그렇게 나의 점심 식사는 다시 만족스러워졌다.
하지만 24년 타워 외길에서 갑자기 나를 탈선하게 한 정체 모를 그 무언가는 여전히 내 안에 있었던 것일까?
11월 20일. 출근 7일 차인 오늘, 나는 또다시 KFC에서 타워버거가 아닌 다른 버거를 주문해 먹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버거를 한 입 베어 문 순간, 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2000년부터 이어온 24년 타워 강점기가 오늘로써 완전히 종식되었음을.
‘켄터키통다리스파이시버거’
모두 꼭 드셔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맛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이 글을 끝맺기에는 아무래도 죄스런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다.
좋은 글이든 후진 글이든 어중간한 글이든 일단 닥치는 대로 써보자. 라는 마음에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아무것도 아닌 글이지 않느냐 말이다...
사실 아까는 '켄터키통다리스파이시버거'를 한 입 베어 물고 타워 강점기가 종식되었음을 직감하자마자 곧바로 이런 생각을 이어서 했었다.
'두려워하지 않고 어쨌든 끊임없이 도전하다 보면 결실을 얻을 수도 있다 라는 주제로 글을 한 편 쓸 수 있겠구나! 사진 첨부해야 하니까 영수증 사진도 하나 대충 찍어두자’ (찰칵).
그래서 원래는 글 후반부에 저러한 메시지를 잘 녹여보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실패한 듯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냥 저렇게, 마치 켄터키통다리스파이시버거 바이럴 마케팅인 것마냥 글을 끝맺는 게 오히려 더 낫겠다는 생각도 여전히 꽤 든다.
그러니 오늘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면서 이쯤에서 급히 마쳐야겠다.
여러분,
적당히 새롭고 적당히 파격적이고 적당히 준법적인 도전이라면, 그렇다면 굳이 멈추지 말고 계속하십시오.
조만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튀김은 바삭하고 육즙이 흘러넘치며 풍미가 깊고 밸런스가 잘 잡힌 켄터키통다리스파이시버거처럼 아무튼 간에 겁나게 훌륭한 무언가를 말이죠.
감사합니다.
식사 잘 챙겨드십시오.
켄터키통다리스파이시버거가
정말 맛있는 당산역 KFC 근처에서.
2024. 11. 20. 레터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