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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tterist Oct 12. 2024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순 없다.

#레터리스트의 과학 이야기 4.

연애를 하다 보면 상대방에게 종종 섬찟한 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나 오늘 좀 달라진 거 없어?”

“여길 와봤다고? 누구랑?”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한데?” 등등...


여러 섬뜩한 말이 있지만, 제 개인적으로 가장 살벌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말은 바로 이런 말입니다.  

   

“XX이 너...변했네...옛날엔 안 그랬는데...변했어..”

     

와우...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그런 무서운 말이죠.

혹 이런 말을 듣게 되신다면 여러분, 당장의 대답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의 행동 역시 무척 잘하셔야만 할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물론 좀 다른 상황에서 나오는 말이긴 하지만 어쨌든 우린 살면서 또 이런 류의 말도 종종 보곤 합니다.   

  

“거봐라, 역시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사람은 안 변한다”     


이건 이제 주로 인터넷 댓글이나 커뮤니티 등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말이죠.          


네, 우린 이렇게 같은 주제를 가지고 완전히 상반된 다른 말을 하곤 합니다.


사람은 변하는 걸까요? 변하지 않는 걸까요? 어떤 말이 맞는 걸까요?

(어쩌면 연애를 하는 사람만 변하는 걸까요?)


사실 명쾌한 정답은 없을 겁니다.

사람은 충분히 변할 수 있다(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생각하시는 분도, 반대로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수 있겠죠. 


이 답은 아마 각자 어떤 경험,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해보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건 굳이 뭐가 맞고 뭐는 틀리다! 이렇게 칼로 무 자르듯 따질 사안은 아닐 테지요.

그리고 사실 우린 이렇게 답 안 나오는 생각, 이럴 땐 이게 맞는 것 같고 저럴 땐 또 저게 맞는 것 같은, 마치 황희 정승 같은 생각에 굳이 시간을 더 쓰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바쁘고 피곤하고 고단한 현대인들이니 꼬치꼬치 따질 필요는 더더욱 없을 겁니다.


자, 그런데 말이죠. 이건 이제 어디까지나 바쁘고 고단한 현대의 우리가 그런 것이고요.

과거의 세상에는 우리와는 좀 다른 분도 꽤 많이 계셨습니다. 우리와는 다르게 돈 많고 시간도 넘치는데 할 일은 딱히 없는, 그런 그야말로 팔자 끝내주는 분들. 지난번에 제가 잠깐 말씀드렸던 고대 그리스 분들, 그중에서도 특히 ‘자연철학자’라 불리신 분들이 바로 그런 부러운 분들이셨죠.


이분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초금수저 출신들이셨기에 먹고살 걱정 따윈 없었습니다. 그저 여유롭게 세상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잠기는 게 이분들의 job이었죠. 그러다 보니 이 분들은 ‘생각할 거리’ 하나하나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진짜 끝내주게 부럽죠..?)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두 분,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역시 그런 팔자 좋은 분들이셨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아마 조금은 생소하신 이름일 텐데요.

이 두 분은요. 고대 그리스 철학이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소크라테스 약간 이전 시대, 그러니까 대략 한 기원전 6세기 즈음의 인물이십니다.


이 두 분은 시기적으로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하시긴 했는데, 활동하신 지역은 좀 거리가 있었죠.

먼저,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스 지방(지금의 터키 서부)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엘레아 지방(이탈리아 남서부)에서 활동을 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활동이라 함은 ‘세상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분은 그렇게 각자의 지역에서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차근차근 쌓아나가셨는데요.

이 두 분은 비록 활동한 지역은 달랐지만 세상을 바라볼 때 중요하게 생각한 핵심 키워드만큼은 똑같았습니다.


바로 앞에서 우리가 잠깐 이야기했던 그 주제, ‘변화’라는 키워드가 이분들의 주요 관심사였지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라는 키워드를 잡고 이 세상을 바라보며 각각 세상을 이런 식으로 설명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 왈,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가 세상의 본질이다.”


파르메니데스 왈,

“아니다, 세상에 변화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변하는 듯 보이는 건 모두 가짜다.”

네, 이 두 분은요. 변화라는 공통된 키워드를 잡고 전혀 상반되는 이야기를 펼치셨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오빠 너 변했어', '아냐 무슨 소리야 내가 변하긴 뭘 변해. 난 안 변해!’의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 버전이었던 건데요.


그럼 이쯤에서 여러분께 다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 두 개의 말을 딱 들었을 때 둘 중 누구의 말이 더 옳은 말처럼 느껴지시나요? 세상은 늘 변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 아니면 세상에 결코 변화란 없다는 파르메니데스?


아마 대부분은 세상이 늘 변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 아무래도 더 마음이 기우실 겁니다.


한 달 전만 해도 너무 무더워서 대체 언제 끝나냐 싶었던 여름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완연한 가을날이 된 것도 변화, 작년 이맘때만 해도 거의 없던 주름살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도 역시 (슬픈) 변화, 잔뜩 먹고 마시고 정신 차려 올라간 체중계에 말도 안 되는 숫자가 찍혀 있는 것도 역시 (매우 슬픈) 변화.


변화라는 건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런 변화는 당연히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 눈에도 잘 보였을 겁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보면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생각했겠죠.


아..이 세상의 본질은 변화에 있구나. 결국 모든 것은 다 변하는구나. 이렇게 말입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하단 약간 좌측의 두 명이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노란 옷을 입고 서 있는 이가 파르메니데스, 그 우측에 앉아 있는 이가 헤라클레이토스)


헤라클레이토스는요. 이런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을 보고 ‘그 누구도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순 없다’라는 기가 막히게 멋진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을 ‘판타 레이(Panta Rhei : 만물은 흐른다)’라고도 하지요. (판타 레이, 외워두시길 추천합니다. 어디 가서 써먹으면 꽤 유식해 보입니다)


물론, ‘세상 만물은 변한다’는 당연해 보이는 말 좀 떠들고 그걸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순 없는 법이다’ 이런 있어 보이는 말로 또 좀 떠들고 이러는 게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자세히 파고들면 저 안에도 또 많은 디테일한 내용들이 있었죠. 세상이 변하는 이유는 대립과 투쟁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 대립과 투쟁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그 대립과 투쟁의 배후에는 ‘로고스’라 불리는 우주 불변의 원리,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있다. 뭐 대략 이런 내용의 디테일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로고스’란 건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도를 아십니까..?’ 할 때의 그 ‘도’ 정도가 될 겁니다)


하지만 이런 디테일들은 지금 여기서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어쨌든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하는 건 헤라클레이토스는 어쨌든 ‘세상 만물은 변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그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순 없다. 세상 만물은 변한다.


어찌 보면 굉장히 당연한 말이죠. 딱히 반박할 생각이 들지 않는 말입니다.

음 그치...그렇지...세상은 변하지...강산도 10년이면 변하고..뭐 그치, 맞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의 이런 생각은 당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큰 무리가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에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응?? 뭐라고? 너 다시 한번 말해봐;;' 이런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건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적 라이벌, 파르메니데스가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으면서부터였지요.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변화, 예를 들어 계절의 변화, 몸의 변화 등등의 모든 변화는 사실 다 새빨간 거짓이다. 그저 우리의 감각이 우릴 속이고 있는 것일 뿐이다. 강물은 흐르지 않으며 계절 역시 변하지 않는다. 세상 만물은 절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헤라클레이토스와는 완전히 상반된 이야기를 파르메니데스는 늘어놓았습니다.


매우 파괴적이고 괴팍하고 실로 충격적인 그런 이야기였죠.


크...그치...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순 없는 법이지...판타 레이...크...

세상 만물은 변한다는, 어딘지 모르게 좀 있어 보이고 도인 같은 이야기에 살짝 취해있던 그리스 사람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반박하고 욕을 퍼부을 준비를 했지요.


하지만 어랍쇼..?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듣자마자 말 같지도 않아 보이는 파르메니데스의 저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의 논리 체계가 꽤나 탄탄했거든요.


파르메니데스는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사람들의 머릿속을 그야말로 헤집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레터리스트의 과학 이야기 5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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