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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tterist Oct 12. 2024

어느 대학 총장님께  드리는 글 (feat. 0.721)

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라디오를 꽤 즐겨 듣습니다.

특히 운전을 할 땐 늘 라디오를 켜놓지요.


라디오는 프로그램도 프로그램인데 프로그램 중간에 들어가는 광고도 은근 듣는 재미가 있습니다.

가끔 진짜 뇌리에 콱 박히는 광고, 어이없게 중독성 있는 광고도 꽤 있죠.


아마..이미지 없이 오직 말로만 승부를 봐야 하는 영역이기에 이쪽 일 하시는 분들이 특히 그렇게 뇌와 귀에 콱 때려 박히는 말 포인트를 잡 잡아내시는 것 같습니다. 대단하신 분들이죠.


어쨌든 전 라디오 광고를 꽤나 즐겁게 듣는 편입니다.


한 번은 이런 경험도 있었죠.


한 대학교가 있습니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종합대학이죠.

이 학교가 라디오 광고를 참 많이 했는데 늘 광고 막바지에 자기네 학교는 서울 성북구에 있는 74년 된 4년제 종합대학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게 21년 12월 말이었습니다. (연도를 어떻게 정확히 기억하냐면 요즘은 저 학교가 자기들은 77년 된 종합대학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거든요)


21년 12월의 끝무렵, 코로나 시즌이었던지라 연말 분위기가 썩 좋진 않았지만 어쨌든 곧 새해가 되는 그런 시점이었죠. 전 무척 궁금했습니다.


'21년인 지금이 74년 차라는데... 그럼 1월 1일 자로 저 멘트가 바뀔까? 안 바뀔까? 저 학교의 홍보팀은 일처리를 어느 정도로 빠릿하게 할까?'


그리고 대망의 22년 1월의 첫 출근날.

XX대학교는 여전히 서울 성북구에 있는 "74"년 된 종합대학이었습니다.


'음...75가 아니네. 그렇게까지 치밀하게 하진 않는군!'

정도의 소소한 아쉬움을 아주 즐겁게 느끼며 전 출근을 했습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이후로도 매일 저 광고를 듣다 보니 어느 날 75로 숫자가 바뀌더군요)


아무튼 말이죠. 전 라디오 광고를 이처럼 즐겨 듣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즘도 그렇죠.

최근 들은 인상 깊은 광고 역시 어떤 대학교의 광고였습니다. (위에 얘기한 대학교랑은 다른 대학교입니다)


이 광고에는 총장님이 등장하셔서 중후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더군요.


'자기는 어디 대학교의 총장 누구인데 우리나라의 골든타임이 얼마 안 남았다.

아이를 너무 안 낳는 게 아주 큰 문제다. 그러니 아이를 낳으시라.' 라는 이야기를 하는 일종의 공익..?광고였습니다.


이 광고 역시 조금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 현상에 대한 어떤 분석이나 인사이트, 대처 방안에 대한 내용은 딱히 없이 "이게 문제니까 아이를 낳자!" 라는 이야기만  이렇게 전파에 태워 보내다니..!


'Simple is Best' 란 게 이런 것인가?!

어쨌든 간에 참으로 임팩트 넘치는 그런 광고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적게 태어나서 (거의 세계 1등으로 적게) 이게 아주 심각한 사회 문제라는 이야기는 사실, 굳이 누가 이렇게 자주 이야기해주지 않아도 다들 알고 계시는 이야기일 겁니다.


이대로 가면 인구가 줄고 그래서 미래 세대의 부담이 지금보다도 더더 심해지고 한국 경제의 엔진이 식을 거고 그래서 결국 우리나라가 망해버릴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다들 문제는 다 알지만 해결이 어려우니 숫자가 0.9에서 0.8, 또 0.8에서 0.7 이렇게 떨어지는 것이겠지요. (정확히는 0.721 정도라고 합니다)



전 결혼을 했고 저와 와이프는 아직 그래도 젊은 축에 들지만 아직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사람 한 명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우주 하나를 세상에 만드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일이기에 적당한 용기로는 감히 엄두가 나질 않더군요.


하지만 말이죠. 저도, 제 와이프도 저 라디오 속 어느 대학 총장님처럼 '이대로 가다간 한국 사회의 미래가 암담할 텐데 어쩌지.. 큰일 났다! ㅠ'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당장 나랑 내 가족 미래도 불투명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한국 사회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라니요...


그런데 말이죠. 얼마 전에는 문뜩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를 안 가지면..그럼 난 평생 아버지가 되어볼 수가 없는 거네..?



한국 사회가 소멸 사회로 접어들고 한국 경제가 동력을 잃고 나라가 반쯤 망하고 어쩌고...


전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기에, 사실 저런 것들보다는 '어쩌면 내가 아버지가 되어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내 부인 역시 어쩌면 엄마가 되어볼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무겁고 또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나라 경제고 뭐고 물론 다 정말 중요한 얘기겠지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에게 엄청난 사랑을 쏟아붓지요.

그리고 험한 세상 속에서 자식을 지키고 잘 길러내기 위해 온갖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지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그 엄청난 사랑을 쏟아부어보는 일,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그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굳게 버텨내는 일.


부모가 되어보지 못해 아직 저 위대한 일들을 해내보지는 못 했지만 얼핏 상상해 보아도 저런 일을 해내는 과정은 고되지만 분명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뿌듯하고, 그 일을 다 해낸 후의 감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보람찰 텐데..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나 역시 분명 이전과는 크게 다른, 한 차원 더 성숙한 그런 내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런 일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어쩌면 없을 수도 있다는 것.

저는 그게 정말로 무겁고 무섭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부모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정말로 걱정하고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요?


그러니 총장님,

다음 광고를 녹음하실 때는 차라리 이런 쪽으로 원고 방향을 잡아보시는 건 어떠실지요..?


이 글을 보실 리는 아마 없겠지마는..그래도 세상일이란 또 모르는 것이니 조심스레 제안드려봅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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