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서 듣는 내 목소리
단골 철학관이 있다. ‘ㅇㅇ철학관’ 이라고 써놓지 않으면 임시 사무실처럼 보이는 곳이다. 비용은 5만원. 광고는 하지 않는다. 처음 간 날 나에게 ‘해도 달도 없는 까만 밤에 떠다니는 섬’ 이라고 했다. 그 말이 시처럼 들렸다. 왠지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어스름한 빛이 나는 하천을 따라 걷던 날에도, 빚을 갚느라 빚을 냈을 때도, 혼자서 이런저런 절을 찾아 다녔을 때에도 떠올랐다. 그 말은 아주 오래 남았다.
마음이 엉망일수록 철학관을 갔다. 그곳은 간이 상담소였다. 재미 삼아 사주를 본 것은 처음이면 충분했다. 남들에게 말 못할 얘기들을 그곳에서 했다.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일들도 “사실은 제가..” 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분에 넘치는 비밀을 속에 담아둘 수가 없었다. 웬만해서는 남들 앞에서 잘 울지 않는 내가 그 곳에 가면 매번 눈물콧물을 동시에 찍어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뭐가 그렇게 위로가 됐었는지.
울고 나면 진짜로 웃을 수가 있었다. “나 괜찮은데?” 식의 애써 눈썹을 올려야 하는 웃음이 아니라, “좋아지겠지.” 라는 말을 하며 웃을 수 있었다. 후련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지만 마음에 남는 것이 없었다. 괜히 머쓱해져서 “여기 오면 울기만 하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철학관에서 집으로 가는 길의 풍경이 새로웠다. 간판 글자의 모양과 색이 달리 보였다. 자동차 유리에 꽂히는 빛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더 이상 철학관을 가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살이는 제 멋대로 펼쳐진다. 하지만 내 마음만큼은 내 뜻대로 할 수 있다. 남에게 했던 질문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대답도 내가 한다. 그 답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령님도, 사주팔자도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얘기해주지 않았다. 나에게는 얘기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사실이 살아갈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