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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n 11. 2021

당신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큰 불행이었습니다

칠월



내가 쓰는 글을 나보다도 아껴주는 사람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헛된 꿈이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던 오늘 아침, 나는 ‘당신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큰 불행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을 시작으로 어떤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례적인 폭우가 쉴 새 없이 쏟던 칠월의 장마철이었다. 적적한 마음에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는 오랜 폭우로 인해 수해를 당한 지역이 잇따라 생겨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현장에 나가 있는 취재 기자의 격앙된 목소리가 날카로운 형태로 내 귓바퀴를 한참 동안 맴돌았고, 나는 어딘가 생채기가 난 듯한 일그러진 표정으로 휴대전화 속 어떤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써놓은 글을 읽으며 아이처럼 솔직해지던 사람이 그 글들에 진절머리를 치며 나를 떠났다. 내 글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너무도 많이 들어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달리 변명하지는 않았다. 실로 내 글에는 여러 사랑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랑 하나하나의 주인 또한 전부 다 달랐다.


지난 사랑을 빠짐없이 기록한 일에 대한 대가는 내게 퍽 준엄한 시련을 안겨줬다. 나는 그 사람이 나의 곳곳에 남기고 간 흔적을 진종일 야금거렸다. 아쉬운 그림자까지도 모두 삼켜버렸을 때쯤엔, 나는 언제나 그랬듯 그 사람과의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고받은 사랑을 순식간에 잃어버렸던 순간까지의 일들을 빼곡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참으로 지독한 병이었다. 그 때문에 몹시 아끼던 사랑을 손쓸 수도 없이 떠나보냈으면서 또다시 무모한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다 또 난파하게 된다 한들 더는 벌릴 입이 없을 터였다.


무척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철이 없었다기보다는 성숙한 어린아이 같았다. 제때 기뻐할 줄 알고, 그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에 조금의 어색함도 없는 사람. 슬플 때는 저 몸을 한없이 낮게 낮추기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내가 몇 날 며칠을 공들여 글 한 편을 완성하면 누구보다도 기뻐해 줬고 또 넘칠 만큼의 칭찬을 건네줬었다. 나의 글을 나보다도 아껴주는 사람과의 사랑이 과연 실재한다 믿는대도 괜찮을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눈물겨울 정도로 애틋하고 자랑스러웠던 글이 훗날 그 사람과 나를 갈라놓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어찌해도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지난 사랑을 기록한다. 더는 마주할 수 없는 사람과의 선명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것만이 불가해한 속도로 흘러가는 이 삶 속에서 내가 그들과 대화하고 또 반성하고 후회할 수 있는 유일함일 테니까. 다시는 나의 글을 나보다도 아껴주는 사람과의 사랑을 꿈꾸지 않겠다는 전제하에 그리 이기적인 마음도 아니지 않나.  


하루가 다 가도록 ‘당신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큰 불행이었습니다.’라는 문장 외에 그 어떤 것도 쓰지 못했다. 나는 끝끝내 그 글을 완성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 그 사람을 만나서 단 한 번도 불행한 적이 없었으니 그 이상 쓸 수 있는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사실은 ‘당신을 만나 당신을 사랑했던 것이 내게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는 것도, 그 문장으로 시작이 되어야만 비로소 글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는 것까지도 전부 알고 있다.


오늘도 그 칠월의 여름처럼 비가 넘치도록 쏟는 날이다. 이른 아침 내내 하늘이 어둡더니 결국 비가 쏟는다. 너무 맑은 빗물 한줄기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손등에 툭 자리 잡았다. 나는 손등만큼만 으슬으슬해졌다. 여름 한 줌이 차갑다가 달갑다가 한다.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 한줄기 빗물로서 나를 야금야금 삼킨다. 그 사람은 이곳에서 온통 여름이고 온갖 여름이 내 손등에 집을 짓는다. 너무 아프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어디서든 잘 살았으면, 절대로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불행하지도, 너무 행복하지도 말고 딱 지금의 나처럼 지냈으면 좋겠다. 가득히 쏟는 오늘의 비가 이 모든 마음을 그 사람에게 무사히 전달해 주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빈다.



적당히 먼 거리에서



여전한



여름처럼 머물러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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