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11
“할멈, 그간 나랑 사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 그 눈 편히 감고 저 멀리 극락으로 가라고. 내 금방 뒤따를 테니까.”
할아버지가 힘없이 누워있는 할머니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할아버지의 손은 빈틈없이 희끗한 할머니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할배요 너무 성급하게 채비하지 말고, 아직 못다 한 세상 구경 천천히 하다가 정 심심하다 싶으면, 더 볼 것도 없다 싶으면 그때 와요.”
할머니가 말했다. 하늘이 돕기라도 한 걸까. 십여 년 넘게 치매를 앓고 살았던 할머니의 정신이, 마치 그간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었냐는 듯 맑고 똑발랐다.
“모르는 소리! 여태껏 당신이랑 눈에 담고, 입으로 맛도 보고, 귀 쫑긋 세워 들은 것들로도 충분한걸요.” 할아버지가 서글서글한 눈을 초승달처럼 얇게 접으며 말했다. “할멈이야말로 살림하랴 자식들 걱정하랴, 제 몸 하나 챙길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았음서.”
“다 그렇게 사는 것을, 뭘 새삼스럽게 말해요.”
“그게 뭐 그리 쉬운 일이었을까.”
줄곧 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일관하던 할아버지가, 끝끝내 참았던 눈물을 주름진 뺨으로 흘려내며 말했다.
“하여튼 주책이여 주책 그런 표정을 보고서 내 어찌 떠나라고 그래요.”
할머니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바들거리는 손을 들어, 할아버지의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그렇지? 나도 참 주책이지. 마지막까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소리만 들읍시다. 할멈도, 나도.”
“그래요. 그래야지.”
“아 참, 여기서 잠깐만 있어 봐요.” 별안간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큰방에서 빛깔 고운 자개함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내가 뭘 찾았는지 한번 보라고.”
할아버지는 세월이 많이 묻은 탓에 녹이 슨 자개함의 손잡이를 조심스레 열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영롱한 초록빛의 옥비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옥비녀 역시 오랜 세월 잊혀있던 탓일까. 한 눈으로 보아도 옛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낡아 있었다.
“할멈, 이게 뭔지 기억나요?”
할아버지가 그 순간만큼은 어린아이라도 된 듯, 천진난만한 표정을 하며 물었다.
“아이고, 이게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대요.” 할머니가 할아버지로부터 낡은 옥비녀를 받아 들며 말했다. “낡긴 했어도 여전히 곱네, 정말 고와.”
“할멈이 내 얼굴도 모르고 팔려 오듯 나한테 시집왔었잖아요. 꽃다운 나이에 참 안 됐다 싶었지 그래도 뭐 어쩔 도리가 있나.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으니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할멈을 맞았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바깥으로 천천히 돌리고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하며 말했다. “몇 날 며칠을 수줍어하면서 나랑은 말도 잘 안 하려 하기에, 내가 없는 주머니 탈탈 털어 사 와서 건네주니 할멈이 얼마나 좋아했소.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예쁘던지.”
“맞아요. 그랬지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하고 살림 꾸려 살려니, 내 얼마나 막막하고 창피했는지 몰라요. 그렇다고 당신 외모가 좀 출중했어야지. 도망가고 싶어도 당신 잘생긴 얼굴 한번 보면, 그 마음 귀신처럼 싹 사라지고 없더라고.”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옥비녀를 다시금 건네며 말했다. “그렇게 뒤숭숭한 마음 갖고 있던 찰나에, 당신이 그 옥비녀를 떡하니 건네는 게 아니겠어요. 그때 완전히 열었지. 열릴락 말락 한 마음을 그때야 활짝 열었.”
할머니가 말끝을 흐리며 속 기침을 크게 한번 하고는, 온몸에 힘을 빼고서 축 늘어져 누웠다. 할아버지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모두 끝낸 듯 편안한 얼굴로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었다.
“많이 사랑했어요.” 할아버지가 자신의 얼굴을 할머니의 얼굴에 조금 더 가까이하고서 말했다. “정말 많이 사랑했다고.”
할아버지의 깊은 고백이 끝남과 동시에 할머니의 숨이 멎었다. 전문적인 의료기기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죽음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후로부터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꼭 잡은 할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도 않은 채, 자신과 평생을 함께한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외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리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할아버지는 그제야 굳게 닫혀있던 입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열며 말했다.
“할멈, 넘어지지 말고 사뿐사뿐 잘 가시게.”
바깥으로는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얄미웠던 유월의 이른 무더위가,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에 작은 선물 하나를 흩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아주 곱고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갑작스러운 비를 피해 처마 밑으로 날아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나비를 올려다보고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유월의 어느 황혼>, 하태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