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 우리가 데지 않은 만큼의 온도

장미 향이 밴 찻잔

by 리은

평소 나의 음료 취향은 확고하게 고소한 쪽이다. 카페를 가도 산미가 없는 묵직한 원두를 고르고, 차를 마실 때면 볶은 보리나 메밀처럼 구수한 곡물차를 좋아한다. 혀끝에 화려하게 남는 꽃차 특유의 잔향은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름 뒤에 ‘티 하우스’라는 명칭이 붙은 전문점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종이 위에 적힌 찻잎의 이름들 아래로 저마다의 원산지와 향에 대한 설명이 빼곡하게 이어진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결국,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꽃차를 주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날도 익숙한 차 이름들을 지나쳐 결국 장미 향이 은은하게 밴 백차를 골랐다. 향이 강하지 않다는 설명이 눈에 띄었고, 은은하다는 말이 좋았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티 전문점 특유의 고요함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기계 소리와 진한 탄내가 가득한 일반 카페와는 공기의 결이 달랐다.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도 이 공간에 맞춰진 듯 나직하게 들려왔다.


- “여긴 카페랑은 또 다르지?”


같이 온 지인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지인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게. 여기선 왠지 목소리를 한 톤 낮춰야 할 것 같아.”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찻잔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직원이 다기 세트를 받쳐 들고 조용히 다가왔다. 찻잎이 담긴 포트를 내려놓고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우며 차가 우러나는 시간을 설명했다. 그는 차가 우러나는 동안 침묵을 깨는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고개만 가볍게 끄덕인 채, 한 발자국쯤 물러서서 우리 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를 비켰다. 바닥을 스치는 신발 소리마저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에서 나는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필요한 만큼만 건네고, 그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우리에게 맡겨두는 태도. 다정하지만 과하지 않은 거리감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찻잎과 모래시계만 남았다. 우리는 그 사이에 생긴 정적을 그대로 두고 투명한 유리관 속으로 잘디잔 모래 알갱이들이 소리 없이 쌓여가는 걸 바라봤다.


마침내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졌을 때 직원이 다시 다가왔다. 그는 숙련된 손길로 찻잔을 데우고, 포트를 들어 천천히 찻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주전자 끝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일정한 속도로 흘러내렸다. 김이 올라오는 걸 보고 한번 멈췄다가, 넘치지 않을 만큼만 잔을 채웠다.


- “뜨거우니, 향부터 맡으시고 천천히 드세요.”


그 말만 남기고 직원은 물러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 김 아래로, 찻잔 속에서 꽃잎이 천천히 벌어지고 있었다.

'이거 보려고 매번 꽃차를 고르게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잔을 들려다가 생각보다 훨씬 뜨거워서 다시 내려놓았다. 컵을 쥐지 못한 채, 벙어리장갑처럼 오므린 손을 잔 주변에 가져다 대며 온도를 가늠했다. 뜨거운 차를 주문해 놓고도 늘 이런 식이다.


그 모습을 보고 지인이 웃으며 말했다.

- “커피랑은 확실히 다르네. 커피는 나오자마자 마셔야 한다고, 식으면 맛없어진다며 서둘렀잖아.”

- “맞아. 여긴 좀 기다리게 되네”


조금 시간이 지나, 찻잔이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식었을 때 나는 첫 모금을 마셨다. 따뜻함이 손바닥 안쪽으로 스며들었고, 향도 그제야 은은하게 느껴졌다.


잔을 편히 쥘 수 있게 되자 그제야 마주 보고 있는 지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각자의 속도로 잔을 비웠다.


사람 사이도 이 찻잔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종종 다정함을 뜨거움으로 착각한다. 사랑도, 열정도, 관심도 펄펄 끓어야 진심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찻잔 앞에 앉아 있으니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조금 식어야 향을 맡을 수 있고, 손에 쥘 수도, 마실 수도 있다는 이 당연한 이치를.


진짜 다정함은 뜨거움 그 자체보다, 그 온도가 조금 내려갈 때까지 기다려주는 쪽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펄펄 끓는 물에 찻잎을 바로 넣으면, 찻잎은 타버리고 맛은 써지기 마련이니까.


때로는 나를 다 안다는 듯 쏟아내는 열광적인 친절이나, 당장 선명한 답을 요구하는 관심이 갓 끓여낸 물처럼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분명 좋은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온도에 데일까 봐 나는 한 발짝 물러서게 된다. 그 과한 열기는 때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의 일상을 할퀴고 지나간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어쩌면 비슷한 온도를 맞춰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제든 손을 뻗어도 괜찮은 온도. 특별한 설명 없이도 옆자리에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는 상태. 서로의 뜨거움에 상처 입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묵묵히 지켜주는 관계처럼.


빈 잔을 내려놓자 소서 위로 달그락, 얇은 소리가 났다. 찻잔 바닥에는 장미향이 조금 남아 있었고, 우리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장미 향이 밴 빈 잔'

photo by.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