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나에게 붓기를 맡기고
밤이 깊어질수록 선명해지는 건 내일을 위한 편안한 졸음이 아니라, 외면하고 싶은 지금 당장의 허기였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지금 먹으면 내일 얼굴이 부을 텐데’ 하는 걱정이 앞섰겠지만, 그날은 그 목소리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침대 위에서 몸을 몇 번 뒤척이며 ‘제발… 그냥 자라’ 하고 나의 이성의 끈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시계를 확인하고, 휴대폰도 멀리 치워두고 눈을 꼭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애써 모른 척 눈을 감아봐도 허기의 목소리는 선명해지다 못해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결국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일단 나오긴 했는데 정확히 뭐가 먹고 싶은지 딱 떠오르지가 않았다. 라면도 아니고, 빵도 아니고, 밥은 더더욱 아니었다.
냉장고 앞에 섰을 때 문득 떠올랐다. 며칠 전 마켓컬리에서 사 두고 그대로 밀어 넣어둔
‘팔백 그램, 대용량 그릭요거트.’
이번 주 저녁은 요거트 볼로 건강하게 먹겠다는 원대한-아니, 꽤 의욕적인 계획으로 사놓고 고스란히 방치된 그 요거트였다.
모든 불이 꺼진 적막한 집안에서 냉장고 문을 열자 서늘한 냉기와 함께 시릴 정도로 하얗고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미간을 찌푸린 채 안쪽을 들여다보니, 반찬통들 사이에 하얀 통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 앞에서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지금 먹을까, 아니면 내일 먹을까.’
나는 분명 냉장고 문을 꾹 닫으며 참아보려 했다. 내일 아침, 한결 가벼운 몸으로 일어났을 때의 괜히 뿌듯한 얼굴을 떠올리며 오늘의 욕구를 잠시 미뤄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닫히지 않은 문틈 사이로 요거트 옆에 나란히 놓인 블루베리가 눈에 밟혔다. 게다가 찬장에는 바삭한 그래놀라까지 대기 중이었다.
이 조합을 두고 그냥 지나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셋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모를까, 약속이라도 한 듯 완벽하게 갖춰진 구성 앞에서 그만 요거트 통을 꺼내 들고 말았다.
작은 요거트 볼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뚜껑을 열자 빈틈없이 들어찬 뽀얀 요거트가 보였다. 꾸덕한 요거트를 두 스푼 크게 떠서 옮겨 담고, 그 위로 씻어둔 블루베리를 알알이 올렸다. 찬장에서 그래놀라까지 한 줌 얹고 나니, 정성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대충이라고 하기엔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가 갖춰졌다.
사실 통에 숟가락을 꽂아 대충 해치울 수도 있었지만, 이 야밤에 굳이 그릇을 고르고 모양을 갖추는 요란스러움이 못내 웃음이 났다. 그래도 어쩐지 나를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기분이 들었다.
첫 입을 크게 떠 넣었다. 차갑고 시큼한 요거트의 뒤로 블루베리의 탱탱한 껍질이 톡 터지며 새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 사이로 바작바작 씹히는 그래놀라의 고소함이 느껴졌다.
밤늦게 무언가를 먹는다는 작은 일탈은 짜릿했고, 나를 다그치던 목소리에 기분 좋게 져주는 항복의 순간은 달콤했다. 요거트 한 그릇에, 그 묘한 맛들이 섞여 있었다.
그릇을 비우고 나니, 밀린 숙제 하나를 끝낸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했다. 싱크대에 빈 그릇을 올려두고 양치까지 마치고는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등을 기대자마자 긴장이 툭 풀렸다. 나조차 모르게 이토록 피곤을 안고 있었나 싶었다.
노란빛 스탠드 하나만 켜진 거실에서 허기는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아까의 그 조급함은 어디로 갔는지, 나른함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소파의 포근함에 몸을 맡긴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이면 거울 속의 내가 평소보다 조금 부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뭐, 내일의 붓기는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주겠지.’ 기분 좋게 져주는 쪽을 택한 덕분에 얻은 지금 이 평온한 졸음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요거트 한 그릇으로 대단한 위로를 받은 건 아니지만, 이런 밤이 쌓이다 보면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한결 말랑해져 있을 것만 같다.
오늘의 나는 이대로, 충분히 달콤했다.
'달콤한 항복'
photo by. 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