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수정과, 카푸치노 그리고 시나몬 스콘

by 리은

‘수정과, 카푸치노, 약과, 애플파이, 허니브레드…

계피, 시나몬, 계피, 시나몬, 시나몬…’


어릴 적 식당에서 후식으로 내어주는 수정과 속에 든 계피의 향은 지독하게 맵고 썼다. 아이의 입맛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맛이었다. 그 향이 코끝에 닿을 때마다 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 방울이라도 입술에 닿을까 봐 고개를 휙 돌려버리며 나의 단호한 거절을 표현했다. 시간이 지나 카푸치노 위에 뿌려진 가루가 ‘시나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때도, 거부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만 바꾼다고 해서 본질의 쌉싸름함까지 달라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그런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이유 없이 쓰고, 굳이 이해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불쑥 나타날 때가 있다. 나를 향한 무례한 참견이나, 도저히 박자를 맞출 수 없는 불협화음의 껄끄러운 관계들. 그럴 때마다 나는 계피 향을 피하듯 그 상황들을 나에게서 밀어내려 애썼다. 싫은 건 싫다고 선을 긋고, 불편한 건 멀리 두는 편이 내 평온함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다.


초겨울의 어느 날, 친구와 찾은 카페에서 원두 향 사이로 아주 희미하고 쌉싸름한 향이 섞여 들어왔다. 의식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쳤을 향인데, 그날따라 또렷하게 느껴졌다. 매장 한쪽에는 시즌이라는 단어와 함께 시나몬 가루가 잔뜩 올라간 메뉴들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아, 계피 향이었구나.’

나는 얼른 시선을 거두고,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 시선이 옆 테이블로 향했다. 갓 구운 식빵 위로 메이플 시럽과 시나몬 가루가 듬뿍 뿌려진 허니브레드였다. 평소 같았으면 미간에 힘부터 주고 고개를 돌렸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향이 맵지 않았다. 버터의 풍미 사이로 스며드는 쌉싸름함이 오히려 궁금해졌다.

‘원래 이런 향이었나.’


그날에야 알았다. 수정과 속 계피 스틱과, 허니브레드 위의 시나몬 가루는 다르다는 것을.

친구는 외투를 벗어던지고 휴대폰을 꺼내 시나몬에 대해 검색해 가며 한참을 설명했지만, 나는 반쯤만 듣고 있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시나몬을 싫어한다고 오래도록 나 자신을 단정 지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수정과 속 계피의 기억 하나로, 다른 향과 다른 맛까지 한꺼번에 밀어냈다는 것. 그 차이를 굳이 궁금해하지도 구분하려 하지도 않은 채로 고개를 돌리며 지내 왔던 것이다.


그 이후로 그 카페를 지나칠 때면 시나몬 향을 떠올랐다. 여전히 계피와 시나몬 그 사이 어디쯤에서 애매하게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향이 거기 있다는 사실이 전처럼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며칠 뒤, 다시 찾은 카페에서 나는 아메리카노 옆에 시나몬 스콘을 나란히 두었다. 대단한 화해의 시도는 아니었다. 단지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싫은 것으로 분류해 두었던 거부감이라는 서랍을 슬쩍 열어보고 싶은 작은 호기심이었다. 작은 접시 위에 담겨 나온 스콘은 포크가 닿을 때마다 파삭하며 부서지는 소리는 냈다. 소리는 작았지만 가루 사이에 숨어 있던 향이 공기 중으로 조금 더 짙에 배어 나왔다.


스콘을 한 입 베어 물자 특유의 알싸한 향이 입안에 퍼졌다. 여전히 독특했지만, 예전처럼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콘의 달콤함과 버터의 풍미 사이를 뚫고 나오는 그 쌉싸름함이 꽤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단맛만 있었다면 조금 지루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스콘을 먹으며 문득 생각했다. 나에게도 아직 그런 ‘계피’ 같은 순간들이 남아 있겠지.

물론 내가 끝내 좋아하지 못할 것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그것들을 굳이 힘주어 밀어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쓴맛이 있어야 단맛이 선명해지듯, 나를 불편하게 했던 순간들도 내 일상의 풍미를 깊게 만드는 하나의 조각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억지로 지우려 애쓰는 대신, 그 나름의 자리를 가진 시간들이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뾰족하게 세워두었던 마음의 날이 아주 조금 둥글게 마모되는 기분이 들었다.


카페를 나서며 메뉴판을 슬쩍 봤다. 다음에는 시나몬 오트라떼를 마셔볼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꼭 다음을 정해두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싫어하던 것을 조금 덜 미워하게 된 것만으로도, 오늘 나의 세계는 그만큼 넓어졌으니까.


*계피와 시나몬은 같은 계열의 향신료지만, 종류와 향은 다르다고 한다.



‘나의 첫 시나몬’

photo by. 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