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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럽 Jul 05. 2024

헤이러너스

Ep.1 사업의 시작

 재개발 전 피맛골 입구


2000년대 초반 돈이 부족하던 시절, 싼 맛에 레트로 감성의 피맛골을 종종 찾아 친구들과 술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저렴하지만 가성비는 정말 훌륭한 가게들이 많았더랬다. 종로 자체를 20대 이후에는 거의 갈 일이 없어 몰랐는데, 이 피맛골이라는 곳이 어느새 재개발되어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나간 적은 있으나 이 건물들이 있던 곳이 피맛골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 장소가 이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어 버렸다.


재개발 이후 피맛골을 대체한 거대 건물들
지금의 피맛골 입구

피맛골 입구가 이렇게 현대화되고 뭔가 랜드마크 같은 느낌이 되어버렸는데, 이 골목에 맛집이 많아 아직도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 그 명맥은 이어지고 있나 보다. 몰랐는데 이곳에 있는 광화문 미진이라는 가게가 정말 유명한 맛집이어서 여기서 식사 한번 하려면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 기다리는 줄과 비견될 만한 웨이팅을 버텨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광화문 미진 맞은편에, 미진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3평짜리 가게가 하나 있다. 이게 뭐 하는 가게인지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갈 법 하지만 한번 맛보면 다시 찾을 확률이 높은 가게(였으면 좋겠다).

24년 4월에 찍은 헤이러너스 정면

원래 카페였던 자리에 24년 2월부터 김밥을 팔게 된 곳. 인테리어는 커녕 제대로 된 간판하나 없는, 이 3평 남짓한 가게가 내 인생 3막을 꿈꾸게 할 가게가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왜냐하면 이 가게는 지인이 만든 가게지 내가 만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오픈전부터 함께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주시기는 했다. 그러나 김밥은, 직장인의 식사는 내가 풀고 싶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거절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회사의 CEO이자 대주주로 일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가.


이 회사의 창업자는 유능한 사업가다. 내가 사업을 하려고 사업계획서를 쓸 때마다 귀찮게 굴며 항상 조언을 얻었던 사람인데, 매번 대차게 까였다. 무엇인가를 제시했을 때 그것에 대해 항상 논리적으로, 자신에게 제시한 사람을 이해시키며 반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내가 수차례 사업계획서를 가져갔음에도 매번 그것을 성공시켰다. 아마도 여러 번의 실패와 성공이 거듭되며 쌓인 통찰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나 역시 굴하지 않고 계속 괴롭혔다. 그러다 그가 말했다. 

사업을 하면 잘하실 것 같긴 한데, 사업 구상 센스는 좀 부족하신 것 같아요 ㅎㅎ 그러지 말고 저랑 김밥집을 한번 해보는 건 어때요?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제안이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거절했다.
"제가 풀고 싶은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라며.


나는 내가 진정 풀고자 하는 문제를 풀고 싶었다. AI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4차 산업혁명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가진 능력과 인프라로는 넘지 못할 벽이 존재함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제안을 받은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창업 컨설팅에 일가견이 있으신 ㄱㅁㅅ교수님께서 "창업가 지망생들 틈에서 사업계획서만 쓸 것이 아니라 바로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면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라며 조언해 주셨다. 공교롭게도 이때 ㅂㄱㅇ 대표는 2번째 제안을 했다.


"김밥집 오픈한 지 1달이 됐는데 매출이 상승하고 있어요. 게다가  재미있습니다. 같이 해볼 생각 없어요?"

내가 이 제안을 받고 고민하게 될 줄 나도 몰랐다. 생각의 기준이 명확하게 서 있으면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나는 그 기준인 '내가 풀고 싶은 문제를 푼다'는 생각이 명확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내가 그 제안에 망설여지는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내가 풀고 싶은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제시한 문제인데도 이것을 내 것처럼 풀 수 있는가? 이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에게서 카톡이 왔다. 


하나하나 짚어봤다.


1번.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나?

김밥집의 멤버는 거의 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고,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0년 경력의 신라호텔 출신 셰프님도 합류했다고 한다 - 합격


2번. 고객이 원하는 제품인가? 

매출이 늘고 있다는 것은 좋은 신호다. 그리고 내가 먹어봤을 때도 김밥 맛은 좋았다. - 합격


3번. 돈을 조금만 쓰며 일하는가?

최소한의 비용으로 3평 남짓한 가게에서 시작했고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돈이 많이 필요한 사업이 아니다. - 합격


그런데도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해 낸 문제가 아닌데도, 이것을 내 문제처럼 받아들이고 풀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제안을 받았던 주말에 철학학교에서 '은유: 연결과 창의'라는 수업을 듣게 됐고, 세상 모든 것은 기존의 것들을 연결함으로써 창조되는 것이지 없던 것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중요한 것은 은유적 생각, 사고의 틀을 깨 조화롭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었던 내게 이 수업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기존의 것들을 은유적으로 조합해 새롭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듯 느껴졌다.


하겠습니다


수업을 들은 다음날 ㅂㄱㅇ대표에게 만나자고 한 후 내가 한 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회사의 CEO로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 심지어 진짜로 뛴다. 그것도 매일 뛴다. 평일엔 집 뒷산의 전망대까지 찍고 돌아오면 3.3km, 주말엔 여의도공원에 나가서 10km를 하루도 안 빠지고 한지 이제 3개월 차에 접어들고 있다. 이전에도 러닝은 자주 했지만 매일 뛰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나의 성장과 사업의 성장을 위해 내가 매일 뛰어야만 성공한다는 믿음으로 뛰고 있다.


우리 회사 전 직원은 1년에 최소 1회 메이저 마라톤 대회에 참가를 해 완주를 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빠른 기록은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완주다. 달리기가 익숙하지 않으면 10km, 달리기에 좀 익숙해졌다면 하프, 잘 달리기에 도전해 보겠다면 풀코스에 지원한다. 이번 10월에 열리는 춘천마라톤에 나와 ㅂㄱㅇ대표는 풀코스에 지원했고, 다른 직원들은 10km 지원으로 첫 마라톤 행사를 진행한다.


헤이러너스는 자신의 길을 달리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하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자신의 길이라 함은 그것이 러닝코스도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만의 인생길을 의미한다. 우리 브랜드가 정말로 그런 브랜드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뛰어보려 한다.



EP2 예고

하루 1600줄 주문이 들어왔다

(바빠서 언제 쓸 수 있을런지는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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