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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Jul 28. 2020

1. 성곽 가요

풀 장난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칭얼거림 한번 없이 쿨하게 일하러 가는 엄마 아빠와 빠이빠이를 한 아이는 바로 그날의 루틴을 시작한다.


할아버지 방에 들러서 기도하시는 할아버지 볼에 쪽 뽀뽀를 하며, "저 와떠여 할아부지." 그리곤 할아버지 옆 전용 좌석에 앉는다.

우리 손주 왔구나 하며 할아버지는 사탕이 가득 찬 서랍을 열어 스코틀랜드 느낌의 포장지에 싸인 달달한 캐러멜 맛 캔디를 하나 쥐어주신다. 오자마자 할아버지 옆에 앉는 이유가 있다.


다음 코스는 할머니. 할머니는 소일거리로 꽃을 만드신다. 흔히 양말에 붙이는 작은 꽃. 아이는 거실 벽에 기대고 앉아 아침마당을 보며 꽃 하시는 할머니 옆에 앉아 할머니의 손놀림에 속으로 감탄 중이다. '손이 어쩜 저렇게 빠르지?, 어떻게 저걸 딱 집어서, 접어서, 치이이익 하지?' 아이는 꽃을 용접(?)하는 할머니를 신기한 듯 바라만 보며 가만히 옆에 앉아 있는다. 할머니가 뜨거운 걸 만지고 있으니 너무 가까이는 못 오게 하셨고, 아이는 꽤 말을 잘 듣는 편이다.


서재에서 나온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아이는 다음 일정을 제안한다. "할아버지 성 위에 가요." 성이라 하면 성곽을 의미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선 현관문을 열면 바로 서울의 성곽이 보인다. 아이에겐 가장 즐거운 놀이터다. 매번 가고 오는 길을 다르게 해서 산책하는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 좋다.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아이의 제안을 받아주신 할아버지와 아이는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늘 가던 길을 걸으며 동네 주민 분들과 인사를 하고 씩씩하게 거대한 돌들이 켜켜이 쌓인 문에 들어선다. 무릎보다도 더 높은 돌계단을 거의 기어오르듯이 하며 아이는 신나게 앞장서 간다.


성곽 안쪽으로 들어선 아이는 대포를 끼우던 구멍 사이로 할머니, 할아버지 집이 잘 있나 보며 경치 구경을 한번 하고 다시 할아버지 손을 잡고 산책길을 걸어간다. 아이는 양옆에 풀 밭이 있는 산책길을 참 좋아한다. 신발에 흙이 밟히는 소리도 좋고, 풀 냄새도 좋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다.


산책을 하는 동안 할아버지와 아이의 구간별 풀 장난이 이어진다. 가는 길에는 박하를 만난다. 늘 그곳을 지날 때면 박하풀 숲을 향해 선 다음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한다. 박하사탕에서나 맛보는 박하 냄새가 허공에서 나는 게 신기해서.


무성한 토끼풀을 보며 아이는 네 잎 클로버를 찾아보기 시작하고 할아버지는 토끼풀꽃을 하나 뽑아 아이에게 반지를 만들어주신다.


쉼터인 정자까지 가는 동안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강아지 풀을 뽑아 드신다. 정자에 도착하면 아이에게 해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미 그게 뭔 줄 알면서도 늘 기대에 찬 눈빛이다. 할아버지의 손놀림과 이빨 스킬로 만들어지는 강아지풀 강아지가 너무나도 신기해서. 심지어 아래의 심지를 돌리면 목도 돌아간다.


내려오는 길에는 애기똥풀을 만난다. 정확한 이름이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샛노란 꽃의 줄기를 꺾으면 노란 진액이 나와서 할아버지는 그렇게 부르셨다. 아이는 애기똥풀 진액을 손톱에 칠해도 보고 진짜 똥냄새가 나나 냄새도 맡아본다.


다시 돌문을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 풀장 난 코스는 아카시아 풀. 아카시아 나무의 이파리는 안쪽 끝을 잡고 잡아당기면 후두두둑 떨어진다. 그럼 아이는 할아버지가 알려주신 대로 양손 가득 잎을 딴 다음 머리 위로 뿌리며 땅에 떨어지기 직전까지 빠른 속도로 손뼉 치며 생일 축하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일명 생일 축하 나무. 그 누구의 생일도 아니다.


그렇게 풀장 난 여정을 마친 아이는 집에 와서 할머니께 성곽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랑한다. 강아지풀 강아지의 목을 휙휙 돌려가며.


30살이 된 아이는 아직도 할아버지만 보면 "할아버지 성 위에 가요."라며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조금이라도 걷는 운동을 하려 더 노력하실 거 같아서. 아이는 안다. 성곽에 가자는 말 한마디면 그 재밌던 풀 장난 시절을 둘 다 떠올린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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