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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Jul 31. 2020

2. 할머니는 돈이 있었다

문방구전

아이는 감기에 걸려서 할머니 손에 이끌려서 병원을 가야 한다. 병원은 무섭다. 흰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괜찮다고 회유를 하며 아프게 하는 게 정말 싫다. 특히 그 주사... 맞으면 낫는 건 알겠는데 맞고 나면 느껴지는 그 얼얼함은 정말 불쾌하다. 그래도 병원 진료를 잘 받고 주사를 잘 맞고 나면 마치 큰 일을 해낸 장군마냥 주변에서 칭찬을 해주기 때문에 오늘도 아이는 그 어려운 걸 해내러 간다.


할머니와 아이는 버스에서 내린 다음 동네에서 제일 오래되고 유명한 최내과를 향해 간다. 빨간 벽돌에 3-4층은 되는 건물이 전부 병원이다. 오늘 할머니의 목표는 용한 최내과의 최 의사 선생님께 아이의 감기를 위한 처방을 해달라 하는 것이다. 사실 최 의사 선생님인지는 모르겠다. 최내과니까 최 선생이겠지 뭐.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가는 아이의 목표는 다르다. 방금 뭔가를 봤다. 최내과 앞에 있는 문. 방. 구.


문방구는 모든 아이들의 파라다이스이자 물건을 내 손에 쥐어줄 수 있는 어른들과의 협상 공간이다. 예쁘고 멋있는 장난감이 다 모여있기 때문에 하나라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잘 보여야 하고 교육을 받아들여야 한다. 협상이 결렬될 경우 가끔은 거리에 드러누워 울부짖으며 투쟁도 해야 한다. 그만큼 어른들에게 문방구는 피하고 싶은 공간이다. 본인들도 다 어른과 전투의 역사를 거쳐온 적이 있는 공간으로 이제는 아이에게 그 어려운 소유욕 절제에 대한 미학을 가르쳐야 하는 고난도의 교육공간이다.


아이는 생각한다. 오늘 병원에서 그 어려운 전투를 해내고 나서 전리품을 얻어가겠다고. 그리곤 버스에서 내려 최내과로 걸어 들어가는 그 짧은 순간 목표물에 대한 스캔을 마친다. 이를 알리가 없는 할머니는 진료 후에 펼쳐질 상황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


아이는 진료를 잘 받았다. 최 선생님인지는 알 수 없는 의사 선생님이 열도 체크해주시고, 주사도 주시고, 약도 처방해 주셨다. 주사가 아파서 눈물은 났지만 할머니가 옆에 있으니 무서워도 잘 참아냈다. 아파서 힘은 없지만 기분은 좋다. 병원에서의 전투를 잘 마쳤고 착한 어린이로 있었으니 원하는 전리품을 당당히 요구해도 될 것 같은 기분 좋은 상상이 든다. 병원을 나선 아이는 고사리손으로 할머니를 이끌고 그곳으로 향한다. 나에게 파라다이스가 되어줄 그 공간으로.


오늘의 목표를 무사히 마치고 긴장이 풀린 할머니는 택시를 타고 집에 갈 생각이다. 아이도 아프고 본인도 오늘 수고했으니 택시를 타는 선물을 본인에게 선사할 예정이다. 근데 아이가 자꾸 어딘가로 발걸음을 끈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다른 곳은 그곳이다. 아이의 소유욕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그곳. 할머니는 아들을 넷이나 키운 육아 왕이다. 아들들은 그냥 빗자루 하나 들고 겁을 좀 주면 말을 다 들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도 똑같은 교육을 할 수는 없다. 할머니 품에 늘 착 안기는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뿐더러 아들들을 키울 때처럼 열정적으로 화를 낼 에너지도 없다. 게다가 오늘 아이 병원비 정도만 들고 나와서 할머니 지갑에는 지금 여유 돈이 없다. 할머니는 오늘만큼은 회유 수법을 쓰기로 한다.


아이는 이미 길쭉하고 얇은 나무판에 바퀴가 달린 물체에 꽂혔다. 이거는 '날아라 슈퍼보드' 만화에서 손오공이 타고 다니는 바로 그 물건이다. 아이는 저걸 가지면 본인도 손오공처럼 슉슉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한다. 오늘의 전리품으로는 제격이다. 하지만 손오공이 되는 기분 좋은 상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할머니 이거 사주 떼요. 이거 가꼬 싶어요."

"안돼. 오늘은 이만 집에 가야 해. 그리고 할머니가 이걸 사줄 돈이 없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협상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돈이라는 게 없다. 물건을 손에 넣으려면 둘 중에 하나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아이는 당연히 없고 할머니도 없다. 기대가 큰 만큼 너무너무 실망해버린 아이는 울지는 못하고 눈물을 한가득 머금고 입을 삐쭉 내민 채 할머니가 잡은 택시에 올라탄다.


가는 내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며 아이는 사색한다. 다음에는 꼭 손오공이 되어보리. 근데 그 순간, 할머니 집 앞에 도착한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할머니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보라색, 갈색, 초록색 그 직사각형 종이, 돈이다. 아이는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할머니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 마음이 벌렁벌렁하다. '할머니가 어떻게 나한테 거짓말을 하시지. 나를 사랑하는 할머니가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하셨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는 주저앉았다. "할머니 돈 있었잖아!!!!! 으아아아아아아앙ㅠㅠㅠㅠㅠ"

동네가 떠나가라 운다. 착한 어린이로 병원이라는 전투장을 잘 치르고 나와서 전리품을 하나 얻고 싶었는데, 할머니는 돈이 없다고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 억울하고, 배신감이 느껴지고, 손오공이 못 된 게 서럽다. 집에 들어와서 현관 앞에 앉아서도 울음은 그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해서 더 크게 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할머니는 당황스럽다. 애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모르겠다. 스케이트 보드를 살 정도의 돈은 없었다고 설명을 해야 할까. 그건 지금 필요한 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어떻게든 사줄 수 없었다고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아이가 너무 자지러지게 울어서 지금은 가만히 달래는 게 상책인 것 같다. 얼마나 크게 울었으면 건너편 집 할머니가 들여다보러 오셨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을 갔다 온다고 들었는데 서럽게 우는 소리가 나서 더 아픈가 해서 와봤다고. 할머니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동네 할머니는 웃겨 죽겠다며 깔깔거리며 웃으신다. 아이가 아파서 운 게 아닌 걸 확인하신 동네 할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아이를 달래주다가 쿨하게 퇴장하셨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우냐며, 감기 다 나으면 하드 하나 사주겠다고 약속하시며. "뚝."


30살이 된 아이는 사실 이 이야기가 전혀 기억에 없다. 아이가 할머니를 얼마나 곤욕스럽게 했으면 옛날 얘기를 해주실 때마다 나오는 할머니의 레퍼토리다. 추후에 엄마가 아이에게 스케이트보드를 사줬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아이는 기억에 별로 없다. 손오공의 꿈은 일장춘몽이었나 보다.  


90년대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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