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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Sep 29. 2020

8. 고백의 습관

짝사랑 전문가

미국에서의 유치원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아이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금세 단짝이 된 몇몇 여자 친구들과 함께 쉬는 시간이면 놀이터에 나가 사방 뛰기, 단체 긴 줄넘기 같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때 잘 놀고 있는 여자아이들을 꼭 이유 없이 와서 쿡 찌르고 도망을 가는 녀석들이 있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여자 대 남자로 나 잡아 봐라가 시작이 된다. 주로 장난치고 도망가는 건 남자아이들. 그걸 응징하러 뛰어가는 건 여자아이들. 점심시간이면 여자아이들은 각종 디즈니 공주가 그려져 있는 런치 박스를 꺼내 놓고 벤치에 둘러앉는다. 그리곤 집집마다 싸주신 카프리썬 주스에 빨대를 꼽고 한 모금씩 들이키면서 남자아이들 평가를 시작한다. 'A는 장난기는 너무 심한데 귀엽게 생겼어.', 'B는 좀 재수 없긴 한데 잘생기지 않았어?', 'C는 자꾸 너 괴롭히던데, 너 좋아하는 거 아냐?'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들끼리 뭉쳐 놓으면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는 남자다. 비록 톰과 제리와 같은 양상으로 서로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미 그 속에는 나름 유치원생만의 하트 시그널들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에게도 눈에 들어오는 반 남자아이가 생겼다. 이름 K, 중국계 미국인, 날씬함, 운동을 잘함, 싱글벙글 웃음, 흘리고 다니지 않음, 여자애들한테 별로 관심이 없음. 아이가 그동안 관찰한 K의 특성들이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의 시선은 늘 K를 향해 있었다. 수업 시간에 한 가지에 열중하는 모습도 멋있었고, 주로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공을 차고 장난치는 모습도 남자답게 여겨졌다. 단체로 얼음, 땡! 을 할 때는 함께 뛰어놀았지만 K는 여자아이들에게 장난을 치지도 딱히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여자아이들 중에서 다행히 K에게 관심이 있는 친구는 없었다. 남학우 품평회에 K의 이름은 한 번도 오른 적이 없었으니. 무심한 듯 제 할 일을 하면서 반 아이들과도 잘 지내는 K의 모습이 점점 아이의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짝사랑은 시작되었다. 정작 K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집에 오면 엄마한테 K가 왜 좋은지 미주알고주알 늘어 놓곤 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처음으로 발런타인데이라는 미국의 기념일에 대해 알게 된다. 선생님은 일주일 후면 발렌타인데이니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담은 편지나 선물을 해보라고 하셨다. 그 길로 집에 돌아온 아이는 발렌타인데이에 K에게 줄 편지지와 사탕을 찾는다.


분홍색 색지를 찾아 하트 모양으로 오리는 아이를 엄마는 분명 말렸다. 사탕만 주던지, 고백은 하지 말라 했다. 유치원에 데려다주면서 봤지만 K는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엄마는 아이가 상처 받을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이라 아이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연애 조언은 하나마나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어차피 저 할 대로 한다고.


아이는 유치원이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아 아쉬웠고, 부끄럽기보다는 좋아하는 K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K를 생각하며 옅은 미소를 띤 채 분홍색 하트 편지지 위에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너 멋있어. 좋아해.' 아껴먹는 유가 사탕 한 움큼도 포장지에 예쁘게 싸서 놔두었다. K도 자신이 준 편지와 사탕을 받고 즐거워하는 상상을 하며 아이는 생애 첫 고백을 준비하고 있었다. 엄마의 얘기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거는 좋은 거 아닌가? 게다가 발렌타인데이인데?


발렌타인데이 당일, 엄마는 유치원 담 넘어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등원 길 교실 문 앞에 줄 서있을 때 아이는 K에게 쭈뼛쭈뼛 다가가서 세상 시크하게 자신이 준비한 분홍색 하트 편지와 잘 포장한 사탕을 건네고 얼른 교실로 들어간다. 주변에 있던 K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K 역시 당황스러운 듯 웃는다. K는 그 자리에서 아이가 정성스레 쓰고 꾸민 편지를 한번 훑어 읽고는 그대로 구겨서 교실 앞 쓰레기통에 넣는다. 사탕은 친구들에게 하나씩 주고 저도 하나 입에 물고는 교실에 들어간다.

'어휴, 지지배 하지 말라니까.'


아이 역시 교실 안에서 이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밖에 나온 아이는 한동안 쓰레기통 안에 있는 분홍색 편지를 쳐다보다가 이내 놀이터로 향했다. 그날 처음 K는 점심시간 남학우 품평회에 이름이 올랐다. 'K는 조용하면서도 싸가지가 없네!' 아이의 단짝들은 카프리썬을 함께 원샷해주며 아이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집에 와서도 말이 없어진 아이에게 엄마는 맛있는 간식으로 기분을 풀어주었고 그날 후로 아이는 K에게 눈길도 관심도 주지 않고 깔끔히 무시했다. 아이는 빈정이 상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상대의 마음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은 K가 못된 놈이지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발렌타인데이를 보내고자 한 자신이 잘 못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때 이미 첫 단추는 잘 못 끼워졌다. 고백에 대한 후회는커녕 아이의 짝사랑과 고백은 습관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초등학교에서는 3년 연속으로 같은 반을 하면서 제일 친했던 남자애가 4학년 때부터 반장도 하고 축구도 잘하는 모습에 반해서 온 동네 소문 다 내고 다닌 덕에 결정적 고백은 받아냈다. 여중생 시절에는 종합 학원에서 같은 반 남자애가 잘생긴 데다가 공부도 잘해서 반했다. 그 친구가 내 앞이나 뒤에 앉으면 장난치기 바빴고, 특히나 옆에 앉으면 그날은 공부를 못하는 날이다. 그 친구 생일에는 같이 학원 다니는 학교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해 욕먹어가면서 2단 종이 케이크를 만들어서 선물했다. 그렇게 티를 팍팍 내며 3년 내내 좋아하며 지냈나 보다.


고등학교는 남녀 공학을 갔다. 고3 때, 같은 반에, 같은 학원들까지 다니던 남자애가 있었다. 학교 끝나고 같이 수학 학원에 가서 둘이 교실에 앉아 있던 날 그 친구는 아이에게 물었다.

'나 방금 세수하고 얼굴이 당겨서 그런데, 너 혹시 로션 있어?

'응, 빌려줘?

'응, 이거 어떻게 발라?

순간 뭐지? 싶었지만 아기 다루 듯 모션까지 더해가며 알려주었다.

'자, 로션을 손바닥에 덜어서~ 손바닥을 탁탁 치고, 그걸 얼굴에 톡톡 쳐가면서 펴 발라.'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포인트이지만 로션을 처음 발라보는 듯한 이 친구의 행동이 귀여워서 심쿵해버렸다. 아이를 참 편하게 대하던 이 친구는 몇 개월 후 논술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같이 가면서 네가 좋다고 고백하는 아이에게 지금처럼 편하게 잘 지내면 되는 게 아니냐는 말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재수를 할 때도, 대학을 가서도 아이는 표현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름 외향적인 성격 덕에 상대가 마음에 들면 편안하게 알아가며 친구를 했고, 친구 하다가 좋아져서 짝사랑을 했고, 그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어 표현을 시작하면 고백이나 다름이 없었다. 무슨 근자감인지는 몰라도 좀 가만히 있으라는 친구들과 엄마의 말은 여전히 듣지 않았다. 하도 고백을 해대서 친구들 사이에선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지만 신여성으로 불렸다. 다만 20대로 들어설수록 감정의 폭은 넓어져 좋아한 사람과 쿨하게 친구로 지내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다. 어릴 때 와는 다르게 마음의 속도가 빠르게 움직이려 할 때면 덜컥 겁부터 났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달까. 즐거움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알아 갈수록 어렵다.


30살이 된 아이는 사랑과 이성관계에 대해 열심히 탐구하던 지난날에 대해 후회는 없다. 종종 이불 킥을 하긴 하지만 넘치는 표현력으로 인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왔으니까.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자신을 받아줬을지도 모르는 상대들에게 고마운 마음마저도 든다. 특히, 연애 스토리를 듣다가 뜯어말리던 친구들에게 더욱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 말 좀 들었다면 지금 상처가 덜하긴 할 텐데. 다행히 이제는 절제의 미학을 배우는 중이다. 그리고 상대를 사랑하기 전에 나를 사랑하는 방법부터 다시 익히는 중이다. 평생 왜 해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던 밀당의 원리를 이제야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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