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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Nov 18. 2020

13. 장래희망의 흐름

꿈?

유년기, 아이의 첫 장래희망은 미용사였다. 머리끈 하나를 사러 가더라도 꼭 취향에 맞는 것을 직접 고르곤 했다. 두 가지 형광색의 꽈배기로 긴 머리끈, 딸기가 달려있는 머리끈, 곰돌이가 달려있는 머리끈, 큰 방울이 달려있는 머리끈, 그 종류도 다양했다. 짧은 팔로는 머리 묶는 것이 힘들었기에 그날의 코디에 맞는 머리끈을 골라서 엄마나 할머니한테 머리를 예쁘게 묶어 달라고 하는 것이 아침 일과 중에 하나였다. 그러면 아이는 빗이 지나가는 자리에 눈이 찢어질 듯한 머리의 당김을 견디면서도 엄마나 할머니의 손길을 버텨 내었다. 패션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작은 고통은 견뎌야 하니까. 이렇듯 머리 장식에 신경을 쓰던 아이는 미용실을 갈 때마다 나는 향긋한 샴푸 냄새와 머리가 예뻐지는 공간인 미용실이 좋았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예쁘게 자르는 미용사들이 멋져 보여서 단순하게도 그 순간부터 미용사가 꿈이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꿈은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다. 이 역시 큰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이 놀던 친구가 어느 날 자기는 유치원 선생님을 하면서 아기들과 놀고 춤추고 노래하고 싶다고 하길래 같이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이 역시 그날부터 유치원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 이는 오래지 않아 '허준'이라는 드라마가 열풍을 일으키면서 아이의 장래희망도 한의사로 바꾸어 놓았다. 드라마에 나오는 허준을 포함한 의녀들이 사람의 병을 고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고 보람되어 보였다. 마침 할아버지가 침을 맞으러도 다니셨는데 '나중에 꼭 한의사가 되어서 할아버지 고쳐주렴~' 하시는 바람에 한의사가 되기로 더욱 마음을 굳혔었다.


초등학교 3학년, 학업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선생님을 만나면서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 직전까지 장래희망란에 써내던 꿈을 만나게 된다. [장래희망: 외교관]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무엇을 잘하고 어떠한 부분을 보충해야 하는지 잘 알고 계셨다. 학부모 상담을 할 때면 외국어에 대한 감각을 키우도록 지속적으로 아이를 지도해 주시라는 방향성을 알려주신 덕에 아이와 가족들은 외교관이라는 꿈을 함께 갖게 되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처음으로 아이 스스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해 준 꿈이었기에 쉽게 바뀌지 않았다. 외교관을 직접 만난 적도 본 적도 없었지만 외교관이라는 꿈의 이정표는 아이가 청소년기에 학교, 전공을 선택하는 다양한 순간에 알게 모르게 많은 동기부여가 되었다.


8년을 간직한 장래희망 외교관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대학의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서 내려놓게 된다. 대학 입시라는 현실에 부딪히면서 아이는 내 성향에 맞고 내가 잘하면서도 좋아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시작으로 외교관이라는 꿈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외교관이라는 꿈이 지금까지 이끌어준 해외 관련 국제적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토대로 아이가 좋아하고 더 배워보고 싶은 문화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Walt Disney'에서 영화 제작 일을 하는 막연하고도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고3 수험생활을 견뎌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친 수험 생활에 디즈니 세상과 같은 솜사탕이 잠시 필요했던 것 같지만, 하고 싶은 일이 주는 두근두근함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 순간이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장래희망을 써내라는 곳은 더 이상 없었다. 결국 정치외교학을 선택하지도, 영화학을 선택하지도 않았지만 아이는 호텔관광대학에 입학했다. 비록 외교관이 되진 않았지만 외국인들과의 활동이 잦았고, 영화제작자가 되진 않았지만 다양한 문화 행사도 만들고 필요할 땐 얼마든지 영상도 제작해 볼 수 있는 아이와는 정말 잘 맞는 환경이었다. 그렇게 점점 무엇을 더 잘하고, 좋아하는지 알게 된 20대의 아이에게 더 이상 '특정 직업 = 장래희망'이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았다. 그보단 어떤 성격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것을 잘하고 그것을 어떻게 더 발전시켜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중요했다. 장래희망을 써내는 작은 칸이 주던 틀을 벗어나자 그만큼 넓어진 선택의 폭에서 아이는 다이내믹한 사회 경험을 시작했다.


첫 회사는 내키지 않았지만 면접 제안을 받아 행사 기획사에 들어갔다. 나름 전공을 살리는 일이라 짧은 기간이었지만 다양한 업무를 빠르게 흡수했다. 하지만, 욕설과 인격모독이 난무하는 사장님의 막장 경영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국 팀의 모든 선임들이 회사 문을 박차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아이 역시 그 다음날 사직서를 내며 성장만을 생각하던 사회 초년생의 꿈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두 번째 회사는 지인 찬스로 스타트업 전략부서에 입사 제안을 받았다. 첫 회사에 대한 상심으로 인해 일에 대한 의지를 많이 잃어버린 아이는 이 역시 100% 내키지는 않았지만 소속될 수 있는 회사가 있음에 감사하며 근무를 시작했다. 업무는 회계부터 전략, 마케팅까지 전부 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나 임금은 6개월 간 단 한 번도 아이의 통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되겠지, 되겠지' 하는 말만 반복하다가 3개월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다른 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1년이라는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었지만 아이는 사회에서 맞닥드릴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 중 몇 가지를 이미 맛보았다. 열심히 일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 나날들이었다.


세 번째 회사는 아이가 직접 발품을 팔아 찾아내었다. 아직도 드는 생각이지만 드디어 만난 천직이었다.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일이었고 재량 것 행사도 기획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가 잘할 수 있고 그토록 원하던 외교적이고 문화적인 일이었다. 비록 즐거운 기억은 아니지만 전에 있던 두 곳에서 습득한 잡다한 스킬들은 이번 직장에서는 신나게 프로그램을 운영해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하나하나 성과를 인정받자 아이의 무너져있던 자존감과 자신감도 점점 회복이 되었고 이 일을 더 잘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다.


30살이 된 아이이게 어릴 적 장래희망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어릴 적 장래희망은 어른들의 직업세계를 동경하는 호기심 많은 아이의 눈이었다면, 나 자신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 가능한 시점부터 장래희망은 내가 만들어가는 내 모습이 되었다. 확신에 차지 않는 선택도 하면서 삐걱대던 아이지만 지금은 네 번째 직장에서도 외교적이고 문화적이기도 한 일을 한다. 일 외적인 여가생활 안에서도 외교적이고 문화적인 활동을 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장래희망이 되어가고 있다. 가고자 하는 궤도에 올라타기까지 우여곡절은 있지만,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잘하는 것에 집중하며 써 내려가는 나만의 이야기가 장래희망이 되어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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