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저귀 갈기의 고수

by 최정성

아내와 만난 것은 대학원생 때였다. 흔한 CC. 그래서 아내의 친구들은 대부분 나의 후배들이었다. 아내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아내는 일 때문에 장례식장에 가기가 어려웠다. 아내는 나에게 부탁했다. 평소 같으면 “내가 거길 왜 가?”라고 했을 것이다. 어떤 것보다 아내 대신 아들을 안고 앉아있을 나에게 쏟아질 따가운 눈총이 무엇보다 싫었다. 가장이나 되어서 공부한다고 아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먹고사는 인간의 자격지심이 발동했다.


분명 육아는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남편의 전업 육아에 대한 인식이 냉담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집안의 가장인 아내의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지렁이도 밝으면 꿈틀 한다고 하지 않는가? 아내에게 아들을 핑곗거리로 꺼냈다. “아이들은 장례식장에 가는 거 아니래.”라는 나의 회심의 카드를 아내는 살포시 즈려 밟아 주셨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내의 속사포 랩이 귓속으로 쏟아졌다. 라임이 완벽했다. 스웩 있는 아내였다.


육아를 해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아이들의 용품을 담기에 최적인 가방이 시판되고 있음을. 그러나 남성용은 찾아볼 수 없다. 시중에 나와 있는 육아 가방을 메는 것이 정말 싫었다. 특히 집에 있는 육아 가방은 철저히 아내 스타일이었다. 파란색에 귀여운 캐릭터가 잔뜩 그려져 있는 그 가방을 멘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결국 내가 아끼는 가죽으로 된 백팩을 찾아들었다. 나는 백팩에 기저귀를 차곡차곡 담았다. 꽁꽁 얼려 놓은 모유를 아이스 팩에 담은 후 백팩에 넣었다. 정장을 차려 입고 오랜만에 머리에도 한껏 힘을 주었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시계는 찰 수 없었다.


육아를 담당하는 부모들은 액세서리를 할 수가 없다. 시계 모서리에 아들이 긁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넥타이핀도 할 수 없다. 심지어 결혼반지도 빼야 했다. 예전의 나는 이런 부분에서 너무나 무지했다. “아이를 낳아도 여자가 좀 꾸미고 그래야지. 너무 아줌마 같이 하고 다니면 보기 흉해.” 따위의 똥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혹여나 아이에게 좋지 않을까 싶까 액세서리 하나, 화장품 하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엄마들의 마음이다. 양육자의 입장이 되어 보니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똥 같은 생각으로 가득 찬 놈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름 멋지게 차려입은 후 아기 띠를 맸다. 패션의 완성은 구두라 하지 않는가? 신발장에 놓여 있는 구두와 운동화를 번갈아 내려 보았다. 결국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선택했다. 육아를 할 땐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가 없다. 또 발이 불편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낭패이다. 아쉽지만 구두는 포기해야 했다.


육아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삶이 아닌, 아이를 위해 하나하나 포기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 같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고, 귀걸이나 목걸이 그리고 화장품을 포기한다. 셔츠를 하나 입을 때도 장신구가 없는 밋밋한 옷을 걸쳐 입어야 한다. 치마는 언감생심이다. 인간으로서 누려왔던 소소한 것들을 억눌러야 한다. 희생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이 성장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러한 헌신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줌마들의 꾸미지 않는 모습이 게으름에서 나타는 현상이라 생각했다. 나는 내 세상에 갇혀 살던 편협한 인간이었다. 그러한 나에게 육아는 지평의 확장과도 같았다. 동시에 낯선 괴로움이었다.


분명 남성이기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여성이기에, 어머니이기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선 “너희만 힘드냐? 집에서 애만 보면 되는 것을 뭐가 그리 힘들다고 불평이 많아?”는 식으로 생각했다. 내가 육아를 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의 현실로 들어왔다.


그렇게 운동화를 신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교통카드 하나 꺼내는 일상의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 된다. 불편함의 연속이다. 이렇게 힘든 일을 여성들은 척척해나갔다는 사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도착한 장례식장, 나는 조용히 고인께 인사를 드린 후 밥을 먹기 위해 구석진 자리를 찾았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아들을 바닥에 눕혀 놓았다. 아들의 배를 살살 만져주며 수고했다고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때 내 얼굴을 알아본 상주와 후배들이 우리가 있는 테이블로 왔다. 그들은 내 예상대로 이것저것을 물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그들이 빨리 꺼져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아들이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아들의 응가 소리 앞에 그들의 눈길 따윈 신경 쓸 가치의 것도 아니었다. 한두 번 갈아본 기저귀가 아니지 않은가? 능숙하게 기저귀를 갈고 기저귀를 돌돌만 후 미리 준비해 간 위생 봉지에 넣었다. 완벽한 뒤처리였다.


“오, 형님 기저귀 기똥차게 가시네요.”라는 말이 들렸다. 난 그저 피식 한 번 웃은 후 아들의 엉덩이가 잘 마르도록 후후 불어주었다.


이후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었다고 전했다. 그 친구들이 내가 기저귀를 가는 모습이 능숙하고 멋있었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아내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머, 그 정도 가지고.”라고 했지만 내심 뿌듯했다. 아마 어깨가 15도는 올라갔을 것이다. 난 그렇게 아빠가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