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을 향해

by 최정성

“승진 씨, 계약기간이 언제까지야?”


입사한 지 5개월이 되어 갔다. 그동안 명희 AP는 날 부를 때 AP명칭을 붙인 적인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회사는 직원들 간의 호칭이 특이했다. 흔히 부르는 사원, 주임, 대리, 과장의 호칭은 부르지 않았다. 이런 호칭이 위계를 발생시키고 조직을 경직시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회사는 딱 두 직급만 있었다. AP와 BP. 이 명칭은 직급의 명칭이 아니라 역할의 명칭이기 때문에 위계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룹 회장도 AP라 불렸다. 그런 장치가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내가 느끼기에는 없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장치를 만들어도 활용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혁신이란 구조적 혁신과 의식적 혁신이 함께 일어나야 가능하다. 회사의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지나치게 구조의 힘을 믿어 버렸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혁신 기업이라 스스로 자부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명희 AP는 계약직인 나와 정규직인 자신이 같은 호칭으로 불리는 것도 못마땅해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나에 대한 호칭은 언제나 씨였다. 그녀에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일종의 계급이었다. 계급이 다른데 같은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다음 달 말까지라고 짧게 답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했다. 그때 회의실로 빨리 모이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명희 AP는 나에게 하려던 말을 멈추고 일어났다.


나는 직원회의에서 배제되었다. 입사 후 첫 회의에는 참가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그다음부터는 회의에서 배제되었다. 그 이유는 잠깐 있다가 떠나갈 비정규직 따위가 왜 회의에 참여하냐고 명희 AP가 이사에게 항의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회의에는 참여할 수 없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진 않았다. 그런 일로 상처 받을 만큼 회사 생활 자체에 기대감을 가진 적이 없었다.


회사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오는 곳이라 생각했다. 회사에서 자아 성찰이 가능할 리가 없을뿐더러 직업이 나의 정체성이 되는 것을 원치도 않았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에 “나는 회사원이요.”라고 답한다면 정말 슬프지 않을까? 또한 회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업무에 불편한 것도 없었다. 내 형편이 불쌍했는지 마케팅 팀의 수진 AP님이 회의 자료를 늘 공유해 주었다. 오히려 회의 시간에 내 업무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시간여가 지나자 회의가 끝났는지 직원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명희 AP가 다가왔다. 그녀는 나에게 20층 스카이라운지로 올라오라고 했다. 이 회사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 그리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곳이 20층 스카이라운지다. 이 회사에는 20층에 회사 카페가 있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그러나 난 높은 곳을 싫어하고 사물을 내려다보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명희 AP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 서로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그러나 회의 직후 카페에서 따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을 보아 회의 내용이 나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명희 시피는 나에게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가를 물었다. 점식 식사 후 몇 번을 와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옆으로 까닥였다.


“그래요? 앞으로는 종종 같이 와요. 그동안 못 챙겨 준 것 같네요. 서운했죠?”


그녀는 뜻밖의 말을 했다.


“회사 생활에 챙겨주고 말고 가 있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는 명희 AP님이 절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나름 돌직구를 던져 보았다.


그녀는 커피잔을 입에 가져갔다. 자신의 입을 커피로 정화하듯.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마치 자신의 불친절함에 대한 법정 변론처럼. 그녀는 비정규직 직원들이 정규직만 바라보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회사에 충성했던 사례들을 하나 둘 늘어놓았다. 그러나 아무도 정규직으로 채용되지 못하고 결국엔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이사님을 악으로 정하고 자신 역시 피해자인 척 말했다. 그녀의 선택은 더욱 비겁했다. 불합리한 일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반복되는 헤어짐 때문에 비정규직에게 마음을 열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다며 자신을 정당화했다. 그녀는 자신이 나에게 했던 차별을 이해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내 귀에는 비겁한 인간의 자기 합리화로 들렸다. 그녀의 말에선 진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나의 정규직 전환이 회의에 거론된 듯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해주시는 데는 이유가 있으시죠?”


나의 말에 그녀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직원회의의 내용을 설명했다. 새롭게 출시하는 교육 콘텐츠의 판매량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민간 자격증과 연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이 민간 자격증 프로젝트의 모든 것을 나에게 위임할 계획이라 했다. 그녀의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해 본 적이 없는 업무였다. 순간 나를 업무에서 배제시키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때 그녀가 커피잔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탁’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저희 팀원들과 다른 팀 BP 님들 까지 모두 이사님께 건의드렸어요. 승진 씨 일 잘하니깐 정규직 전환 대상자로 올려달라고요. 이사님께서 이 건 맡겨보고 업무 성과 보고 결정하시겠대요. 저도 그렇고 BP님도 그렇고 승진 씨를 도와 드릴 거예요. 이 건 잘하고 앞으로 쭉 같이 일했으면 좋겠어요. 할 수 있죠?”


그녀의 말은 너무 달콤했다. 그동안 그녀가 나에게 한 짓거리들이 기억에서 모두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 악마가 주는 달콤함이라 할지라도 받아먹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계약기간 종료 한 달을 앞에 두고 최고의 기회가 왔다. ‘이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 나도 정규직이 되고 싶다.’ 달이 보름달로 가득 차 오듯 머릿속이 온통 정규직이란 단어로 가득 차올랐다. 더 이상 회사에서 서러운 꼴 좀 안 보고 살고 싶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너무 감사합니다. 잘해보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부탁했다. 그녀를 이해하는 척 감사를 표하는 나 자신이 역겨웠다. 그러나 정규직이 되고 싶었다. 될 수 만 있다면 이딴 허리는 백번 더 접어 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다. 그녀는 나의 행동에 당황했는지 얼굴이 빨개졌지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퇴근을 하는 내내 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옥탑에서 벗어나 좋은 아파트에서 사는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차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갑고 을씨년스러운 비가 계속 내 차 창문을 두드렸다. 난 평소와 달리 차창을 열지도 하늘을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것들에 신경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저 행복한 상상 속에서 나만의 핑크빛 미래를 그렸다. 그러나 계속해서 비는 창을 두드렸다. 마치 누군가가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처럼 비는 차창에 흐르고 또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