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도리

by 최정성

명희 AP에게 협력 업체 대표와 대화한 내용을 전달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이사실로 갔다. 나는 이사님 앞에서 오천 원으로 협상한 내용을 전달했다. 그러나 이사님의 반응은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


“수고했어. 승진 AP. 그런데 정말 오천 원을 받았단 말이지? 거기도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네. 좋아. 이번엔 삼천 오백으로 협상해봐. 오천 원을 받았으면 삼천 오백 원도 받을 거야. 그리고 계약서에 고객 응대 업무 부분이 없더군. 그것 삽입해서 전부 그쪽으로 돌려. 정말 수고했어. 명희 AP는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하고 승진 AP는 나가봐.”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명희 AP는 내가 이사님의 말을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먼저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나가지 않았다.


“이사님, 삼천 오백 원으로 하면 저쪽 수익이 없습니다. 법무팀에서 최대치를 생각한 것이 칠천 원인데 삼천 오백이라니요. 오천 원 받은 것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은 겁니다.”


이사님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명희 AP가 놀라 빨리 나가라며 팔목을 잡아끌었다. 이사님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의견을 듣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의 기분 나빠하는 표정은 나의 오기를 자극했다.


“삼천 오백 원으로 때려도 저긴 받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재료비는 빼면 최저시급도 안 나옵니다. 그렇게 갑질 해서 번 돈으로 무슨 교육 사업을 합니까? 만약 이게 소문이라도 나면 회사 평판은 바닥을 칠 겁니다. 평판을 중시하는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인데 눈앞의 작은 이윤에 현혹돼서 큰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삼천 오백 원 지시사항은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사님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회사의 기본은 돈을 버는 것이지 평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부서 내부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사님이 말하는 내부 사정은 회사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었다. 사내 이사인 이사님은 회사 내부에서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다. 그 내밀한 속사정까지야 내가 알 턱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리저리 들리는 풍문이 그러했다. 이사님의 경영 방식에 대한 회사 내 평가가 좋지 않았다. 현재 원격교육부는 계열사로 있는 자체 브랜드다. 대외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브랜드를 파기하고 계열사가 아닌 부서로 이관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을 원격교육부의 직원들은 반기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사님 본인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람이 구석으로 몰리면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이다. 이사님 역시 자신의 처지 때문인지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하려는 행동은 자신에게도 그리고 회사에게도 이롭지 않았다.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익을 창출하면 결국 브랜드 가치는 하락한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자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런 거야. 시키는 일이나 잘해. 나가봐.”


나는 이 업무는 더 이상 맡을 수 없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이사실을 빠져나왔다. 이사실을 나와 책상에 앉자 무력감은 더욱 밀려왔다. 눈 딱 감고 이사님이 시키는 대로 일을 진행해도 된다. 나는 시켜서 하는 사람이지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아니, 누구도 나를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생활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스스로 위로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의 정체성을 회사원에 못 박아 두고 살고 싶지 않았다.


곧이어 명희 AP가 이사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곧바로 나에게 다가왔다. 명희 AP는 나를 노려보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명희 AP를 따라나섰다. 사무실 밖 복도에 들어서자 그녀는 입을 열었다.


“승진 씨, 왜 그래? 여기 회사잖아. 우리는 회사에 이익이 되면 그만이야. 우리 회사가 무슨 NGO야?”


그녀는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AP님 말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사람 사는 곳 아닙니까? 돈도 봐가면서 벌어야죠. 열심히 일해서 좋은 콘텐츠 만들어서 벌어야죠. 다른 사람 쥐어짜서 벌면 그게 교육회삽니까?”


평소와 달리 언성을 높이는 나의 모습에 그녀는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지 않았다. 나보다 더 언성을 높였다.


“승진 씨, 회사 그만 둘 거야? 어렵게 들어왔잖아. 왜 이사님이 자기 같은 계약직에게 이런 큰 건을 맡겼겠어! 계약 기간도 얼마 안 남았잖아. 이건 기회라고 했잖아! 이 건만 잘 해결하면 정규직 자리도 가능하다니깐. 다들 돕고 있잖아!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정규직, 그놈의 정규직! 사람답게 살아야 정규직도 의미가 있지. 개새끼한테 정규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이 할 짓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이 있는 겁니다!’라고 용감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래 입술을 질끈 물고선 터져 나오려는 말들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는 나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더니 커피나 한 잔 하고 들어오라며 먼저 사무실로 돌아갔다. 나는 한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버지의 굽신거림을 받아먹던 그 인간이 떠올랐다. 그는 그저 지시에 따랐을 것이다. 과거의 피해자가 이제는 장성하여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됐다. 나는 결정을 해야 했다. 달이 될지 아니면 지구가 될지. 인간으로 살아갈지 회사의 돈 버는 기계로 남을지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결정은 쉽지 않았다. 길을 알고 있는 것과 길을 걸어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