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갈등이 깊어질수록 결정이 어려웠다. 그러나 답은 분명했다. 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사무실로 돌아가 퇴사를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그래 봐야 이주일 후면 계약도 끝난다. 그래도 스스로 나가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툭 쳤다. 그녀는 수진 AP였다. 그녀는 이 사무실에서 나를 계약직 직원이 아닌 사람으로 대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회사 건물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그녀를 따라 말없이 걸었다. 그녀가 나를 데려간 곳은 회사 근처 초등학교였다. 그녀는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았다. 나도 그녀를 따라 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회사는 이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이제 들어가 봐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보며 빙긋 웃고는 다시 아이들만 바라보았다. 내 처지에 누굴 걱정해 주는 것도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만 보았다. 몇 분의 시간이 더 지나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승진 AP님 설득해 보라고 이사님이 저 보낸 거예요. 늦게 들어가도 돼요. 그리고 이번 달 말이 끝이에요. 저도 계약직이거든요. 모르셨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승진 AP님 설득할 마음 없어요. 명희 AP가 나가보라고 안 했어도 나왔을 거예요. 미리 말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해서…….”
그녀는 내가 몰랐던 일들을 하나, 둘씩 들려주었다. 자신이 입사한 후 계약직을 회의에 못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으나 명희 AP 때문에 콘텐츠 팀만이 계약직을 회의에서 배제시켰다. 그리고 지금의 내 상황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이 이상했다. 내 상황을 잘 안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그녀가 알고 있는 상황과 내가 알고 있는 상황이 같은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협업에 대한 분배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녀가 전하는 이야기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먼저 명희 AP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명희 AP는 이 부서에 오기 전 BP 즉, 팀장급이었다. 그러나 퇴사가 거론될 만한 문제로 인해 강등된 후 콘텐츠 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명희 AP의 퇴사를 막고 콘텐츠 팀으로 데려온 사람이 이사님이었다. 이사님과 명희 AP는 각별한 사이였다. 그리고 나에게 협업 체결 업무를 맡긴 것도 명희 AP의 계획이었다. 이사님과 명희 AP는 이번 협업을 통해 부서의 재정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부당한 협업을 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분배 문제에 있어서 일종의 갑질 문제가 발생되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선택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나는 그들에게 철저히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미끼를 들고 나를 낚시한 셈이다. 나는 보기 좋게 파닥 거렸지만 마지막 순간 벗어났다.
만약 삼천 오백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착취를 성공시켰더라도 퇴사는 결정되어 있었다. 마지막 순간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사님 앞에서 소리쳐 준 나 자신이 고마웠다.
“수진 AP님은 내가 정규직이 안 돼서 이사님께 소리쳤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녀는 그렇다고 말했다. 아마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이사실이 생각보다 방음이 잘되는 모양이다. 애써 내 입장을 수진 AP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는 회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