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세 살이 되었을 때,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박사 과정은 석사 과정과는 또 다른 압박감이 있다. 육아와 함께 진행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주변에선 어린이집에 아들을 보낼 것을 권유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 너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 권유의 근거였다. 다른 이유를 떠나 이 근거는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특별하길 바란다. 아니, 자신의 아이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들은 정말 모두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잠재력과 능력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위대하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다. 부모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정말 그렇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은 특별하다. 그러나 부모들 혹은 어른들은 이런 아이들의 교육 방식을 남들과 같은, 남들이 하는 방식을 택한다. 즉, 평범하게 만드는 것을 교육이라고 말한다.
나의 아이가 특별하다면 혹은 특별하길 원한다면 그 아이가 가진 특별에 맞는 교육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린 그런 교육을 하는 사람들을 유별난 인간들이라 비판한다.
이 비판은 나에게도 유효했다. 난 아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만의 특성을 훼손하고 싶지는 않았다.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을 남들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을 습득하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그 아이만의 것을 해야 한다.
남들이 아이를 재우는 시간에 나와 아들은 산에 갔다. 세 살이 된 아이와 야간에 산행이라니! 다들 위험하다고 혹은 일찍 재워야 키가 큰다고 혹은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여주고 싶었다. 낮에 본 나무, 돌, 꽃과 밤에 보는 나무, 돌, 꽃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스스로 만지고 느끼고 바라보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문제는 내가 박사 과정생이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양의 책을 읽어야 하고 글을 써야 한다. 매주 작게는 두 편 많게는 네 편 정도의 소논문을 논문 격식에 맞게 제출해야 한다. 또한 독서의 양도 상상 이상이다.
만약 하온이를 어린이집에 보낸다면 그 시간에 독서를 하고 소논문을 작성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나는 아들과 함께 어린이집에 사전 답사를 갔다. 사실 사전 답사라곤 하지만 등록을 위한 방문이었다. 그렇게 몇 곳의 어린이집을 방문한 후 결심을 굳혔다. 유별난 아빠가 되어야겠다고.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내가 느낀 어린이집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린이집에 있는 아이들이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주눅 들어 보였다. 아이들 특유의 생기가 조금씩 퇴색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뛰어놀 시간에 낮잠을 자는 아이들의 모습, 줄지어 밥을 먹고 자신이 싫어하는 반찬도 먹는 아이들.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과 깊은 유대가 아닌 공동의 소유로 공유해야 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관계는 호와 불호가 명확하다. 그 대상은 주로 장난감이나 인형이다. 그러나 깊은 관계를 맺는 행위 자체가 어린이집에서는 나쁜 행동이며 규칙을 위반한 행동이 된다.
누군가는 그것을 사회화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말을 잘 듣고 규칙을 척척 따르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말 그대로 아이들이니깐.
어른들은 물건 하나를 보아도 그것의 양화 상태에 따라 가치를 측정하고 보존하려 한다. 그렇기에 어른들의 소유 개념은 희소성의 가치와 연결된다.
어른들은 물건의 가치를 가격이라는 가치 안에서 생각한다. 나도 그렇다. 집에 기타가 있다. 하온이가 이것을 가지고 놀다 금이 간 적이 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이게 얼마 짜린데”가 떠오른다. 사물의 가치를 그 고유성이나 관계적 의미 등이 아니라 돈의 가치(양적으로 가치를 환원하여 생각한다고 해서 양화라고 합니다)로 환원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은 철저히 관계적 가치에서 생각한다. 소중한 장난감, 인형들은 비싸고 명품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늘 자신의 곁을 지켜주고 자신의 친구이며 자신의 취향이기에 소중한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언제나 대상을 바라볼 때 주관성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 주관성이 아이들을 빛나게 만든다.
그러나 규칙을 배우고 사회화 과정에 들어서면 보편화된 가치 척도 방식을 배우게 된다. 또한 규칙을 배운다는 것은 다른 말로 눈치를 보게 됨을 의미한다. 강한 자 앞에서 눈치를 보는 인간은 강자의 눈이 사라질 때 방종하게 된다.
아이들을 버르장머리 없이 키우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규칙을 알려주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규칙이란 관계성을 바탕으로 배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규범으로서 가르친다. 징계의 도구로서 규칙을 배운다면 징계의 사각지대에서는 방종하게 된다.
반면, 관계성을 중심으로 배운 규칙은 규범 규칙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관계성은 지속적이며 끊을 수 없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내적 관계성은 계속 유지된다.
양화 된 규칙이 아닌 관계성의 규칙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것은 사실상 어린이집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면 관계성이란 친밀성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친밀성은 1 대 1 관계의 지속성과 밀도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의 주 양육자가 되면 깊은 친밀성은 형성되기 어렵다. 피상적 친밀성이 깊은 친밀성이라 아이들은 착각하게 되어 버린다. 결국 친교로서의 존재인 인간이 아닌 규칙성의 존재가 될 확률이 커진다.
이런! 오랜만에 불타올랐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펼쳐 놓았지만 결론은 하온이를 어린이집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막상 결정은 했는데 학업, 그것도 박사 학위 과정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양립 가능할까? 나의 선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