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가 끝난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삼 년 만의 개인 외출의 즐거움보다 아들을 혼자 돌보고 있는 아내의 근황이 궁금하면서 걱정이 되었다. 하온이가 태어난 지 막 100일이 되기 직전, 아내는 복직을 했다. 그 이후 아내는 아들과 둘만의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집에 돌아왔을 땐 아들은 이미 자고 있었다. 아내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피곤해 보이는 아내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쉽지 않은 하루를 보낸 듯했다. 나는 아내 옆에 앉아 아들과 보낸 하루의 소감을 물어보았다.
“오랜만에 둘 만의 시간을 보냈잖아. 어땠어?”
"너무 힘들어. 잘하고 싶은데 잘 안돼. 진짜 너무 힘들어."
"어떤 부분이?"
나는 아내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러나 아내는 입을 닫았다. 아내는 나의 질문을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아내의 그런 행동은 나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아내를 다그쳤다. 그러나 이내 입을 닫았다. 아내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여는 타입이다. 몇 분의 침묵이 흐른 후 아내는 입을 열었다.
아내는 아들과의 하루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아이의 행동이 납득이 가지 않고, 통제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고 했다. 그중에서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아들이 자신을 낯설어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나와 함께 있을 땐 아들에게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꼈다.
“여보, 예를 들어 어떤 일이 있었어?”
아내는 아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러나 하온이는 책상에 올라가거나 수납장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아내는 하온이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아들은 듣지 않았다. 아내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들에게 화가 났고 언성을 높였다. 아내가 정말 힘들었던 것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아들의 행동이 아니라, 아이에게 화를 내는 자기 자신이었다.
나는 하온이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막은 적이 없다. 만약 아내가 전업 육아를 담당했다면 하온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온이의 전담 보육자인 나는 그런 교육을 한 적이 없었다.
아내에게 보육의 최우선은 안전이었다. 위험에서 보호하는 것이 보육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어쩌면 이것이 아빠 육아의 특징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나는 오히려 아이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지지해줬다.
“올라가 봐. 도전해봐. 겁먹지 말고. 대신 아빠가 받아줄게. 올라가 봐! 네 뒤엔 내가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아들을 양육해왔다. 걸음마 훈련을 할 때도 그랬다. 아이가 넘어져도 달려가지 않았다.
“스스로 일어나. 하온이는 할 수 있어!”
우리는 양육자를 보호자라고 부른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보호할 것인지는 육아 철학의 문제다. 아내는 위험할 수 있는 행동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 아이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삼 년 동안 그렇게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 나는 위험한 행동이라도 도전하게 했다. 그리고 위험이 직접적으로 아이에게 닥칠 때, 아이를 보호해줬다. 높은 곳에 올라가다 떨어져도 아빠가 옆에 있다며 보호해 줄 거라는 믿음을 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정답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두 양육 방식 모두 장점과 약점이 있다. 문제는 아들이 나의 양육 방식에 익숙해져서 아내의 방식이 아이와 갈등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전담 양육자니깐 내 방식을 믿고 따라와 줘.”
그러나 나는 오해하고 있었다. 아내가 충격을 받은 지점은 육아 방식의 차이에서 온 갈등이 아니었다. 아내가 힘들어했던 부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아내는 자신이 엄마이기에 당연히 양육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감정을 모두 읽어 내고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면 우리 사회에서 양육은 엄마의 기본 기능이라 인식되기 때문이다. 엄마니깐 당연히 양육도 감정 공감도 잘해야만 한다는 호명 태제가 아내를 힘들게 만들었다.
엄마는 양육을 잘해야 한다와 같은 암묵적인 명제들이 아내를 압박하고 있었다. 여성이 받는 사회적 요구는 아내로 하여금 자괴감을 느끼게 했다. 그날 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사회적 규범이나 통념의 허구성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 역시 남자이기에 경험해야 했던 편견의 눈빛과 상처들이 있기에 아내가 느끼는 슬픔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편견은 편견일 뿐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엄마이기 때문에 육아를 잘해야 한다는 통념은 편견일 뿐이다. 그러나 아내는 쉽게 그것을 떨쳐내지 못했다.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편견을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편견들은 상식이란 이름의 옷을 입고 우리를 억압한다. 편견을 상식이라 믿게 되면 편견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자기 안의 편견을 부수는 첫 단추는 이것이 상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또한 아내가 이런 편견에 있다는 것은 뒤집어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아내의 평가다. 육아는 여성의 것이고, 여성은 육아에 특화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이 가정에서 양육을 담당하는 나에 대한 아내의 관점은 양육에 부족한 존재일 것이다. 이 편견을 부수지 못하면 아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있지만 지속적인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게 될 것이다.
편견은 무서운 것이다. 편견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다양성을 파괴한다. 그러나 조금만 사유하면 편견이 얼마나 엉성한 것인지 발견하게 된다.
어떤 일이든 처음 시작할 땐 미숙하고 힘이 든다. 육아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육아는 성별이 아닌 숙달을 통해 완성된다. 여성이라 더 잘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이라 못하는 것도 아니다. 많이 해본 사람이 잘하는 것이다. 육아는 숙달의 문제다. 이 당연한 이야기를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혀 성별에 따른 역할로 이해하고 있다.
아내와 대화는 긴 시간 지속되었다. 성별에 따른 역할론의 허구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구조가 가지는 개인에 대한 폭력과 강요들을 후기 구조주의 철학의 관점으로 설명했다. 나의 대화 방법의 가장 큰 문제가 이것이다. 나는 자꾸 철학적 이론을 아내에게 들이 민다. 이게 효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내의 편견은 쉽사리 부서지지 않았다.
어느덧 날이 밝아 왔다. 그러나 아내는 여전히 엄마로서 역할에 대한 기존의 가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내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힘들어했다. 나는 아내를 안아 주었다. 그리고 울먹이는 아내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당신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어. 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잖아.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 삶에 자부심을 가지길 바라. 늘 당신에게 고마워.”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나의 품 안에서 울먹였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안의 편견과 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