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말이야”를 입에 달고 살던 마초였던 내가 어쩌다 주부가 되었다.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살림을 살고 장을 보고 아이를 돌보는 삶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참 많이 갈등했다. 아니, 여전히 갈등하고 있다. 아직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엔 “남자는 말이야”가 살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갈등의 정도와 빈도가 줄어들고 있다.
육아를 처음 맡게 되었을 땐, 약간의 대인기피증도 찾아왔다.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그런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철학이었다.
요즘 인터넷에 보면 전담 육아를 폄하하는 글이나 의견들이 종종 보인다. 그리고 이 전담 육아에 대한 폄하와 비하는 여성에 대한 비하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많은 이들이 육아를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한다. 일반적으로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애나 보면서 뭐가 힘드냐고 징징 거리냐는 식의 글들을 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다. 경제 활동을 통해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행위는 위대한 일이다. 그리고 그만큼 살림을 살면서 아이를 돌보는 일도 위대한 일이다. 이 둘은 경쟁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둘 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누가 더 힘든가?”식의 대결 구도는 저급한 수준의 논쟁이다.
경제 활동을 위해 삶에서 포기하는 부분들이 있다. 직장 생활이든 사업이든 자기만의 시간을 포기하고 가정을 위해 열심히 경제 활동을 한다. 육아 역시 마찬가지다.
육아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포기가 따른다. 전담 육아를 할 때 가장 먼저 포기되는 것은 사회적 관계망이다.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는 일도 때로는 사치가 된다. 전화 통화는 꿈도 못 꾼다. 육아를 모르는 사람들은 육아를 낭만적으로 이해한다. 분명 낭만적인 부분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현실은 치열하다.
유아를 낮잠을 재우고선 그 옆에서 같이 잠을 잔다든가 혹은 아이가 잠을 잘 때 친구와 전화 수다 삼매경에 빠지는 것은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다. 정말 가뭄에 콩 나는 일이다. 아이가 잠들었다면 그때부터 살림 스타트! 빨래도 돌리고 설거지도 해야 한다. 아이가 깰까 싶어 청소기 대신 빗자루와 물걸레로 청소를 한다. 아이가 일어나면 바로 먹을 것을 찾는다. 당연히 미리 요리를 해놔야 한다. 정말 쉴 틈이 없다.
만약 아이를 재우다 같이 잠이라도 들어버리면 “업무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나 버린다. 육아도 회사 생활과 똑같다. 분명한 업무 시간이 있고 과업이 있다. 때로는 회사보다도 지독하게 타이트하다. 화장실 가는 시간을 만드는 것, 화장실에 앉아 마음 편하게 볼일을 보는 것도 어렵다.
육아를 하면서 생긴 버릇 중 하나가 화장실의 문을 닫지 않고 볼일을 보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하온이의 개똥 섭취 사건만 보더라도 그렇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일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사고가 터진다. 육아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육아는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간혹 이런 말을 해주는 선배 혹은 친구들이 있다.
“육아 그거 어렵냐? 그런 일 말고, 남자가 큰일을 해야지. 가방끈도 긴 녀석이 왜 그러고 살아?”
나 역시 직접 육아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처음 육아를 시작할 때, 나에게 육아란 전혀 숭고한 것이 아니었다. 육아는 실패의 상징이었다. 만약 실직하지 않았다면 육아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육아를 시작한 직후의 몇 달은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다. 자격지심과 자기 연민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늘 의기소침했다. 가부장적 질서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내리는 너무나 큰 형벌이었다. 그러나 자기 세계가 무너져야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통해 존재의 충만감을 맛보며 자기 연민과 좌절에서 벗어난 부성의 이야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은 충분히 놀랍고 아름다웠다. 그런 아이를 키우는 것도 행복했다. 그러나 늘 공허함이 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실패한 인생이 아닐까 하는 고민과 갈등 때문이었다.
육아의 기쁨을 누리는 것과 육아 행위를 숭고한 행위로 인식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감정적인 영역이라면 후자는 인식론적 영역이다. 육아의 즐거움을 점점 알아가면서도 자기 안의 내적 갈등은 지속되었다. 그때 나를 잡아준 것은 육아 전문서가 아니었다. 나를 잡아준 것은 철학책들이었다.
인간 존재의 가치, 그 자체로의 숭고함을 철학이 전달해주었다. 유용한 일, 돈이 되는 일이 존재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한 것의 힘! 무용의 급진성을 알려주었다. 사회가 규정하는 가치나 문화가 절대적 가치 기준이 아님을 철학은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렇지만 사람이 쉽게 변하는가? 내 머릿속의 질서들은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남성이라는 젠더의 역할을 여전히 강요받는다. 스스로 육아 예찬론자라고 떠들고 다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육아라는 짐을 던져버리고 사회 경제 활동을 하고 싶은 욕망, 돈을 벌고 싶은 욕망, 육아를 하찮은 것으로 보고 싶은 무지의 관성은 지금도 가끔 나를 괴롭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철학책을 꺼내 읽는다. 인간의 존재의 본질이 관계적 구조망에 있다는 가르침을 기억하려 한다. 철학이 지속적으로 던져 주는 존재에 대한 숭고함과 숭고함을 대하는 태도는 육아가 본질적으로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려 준다. 그렇게 흔들리는 나를 철학은 잡아주었다. 참 운이 좋았다. 흔들릴 때마다, 갈등할 때마다 나를 잡아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참 운이 좋은 것이다.
공부깨나 한 녀석이 전담 육아를 하고 있다는 현실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겐 이상한 것 같다. 사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처음 육아의 시작은 그냥 했던 것이다. 어린이집에도 보내지 않고 남자가 살림을 도맡아 하는 모습도 어색했을 것이다. 그런데 별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냥 했다. 삶을 살아야 하니, 내 아이를 내가 돌보는 것이 좋으니 그냥 했다.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육아를 한다는 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한 것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다고 틀린 것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 남들이 가는 것과 조금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축복도 이런 축복이 없다. 철학을 공부했기에 육아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다 보니 육아의 가치를 배우게 된 것이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 내다보니 인간의 가치를 배우게 된 것이다.
육아를 하면서 만난 양육자들은 대부분 엄마들이었다. 처음에는 엄마들과 대화하고 친분을 쌓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은 나를 남성이 아닌 아빠로 인정해주고 받아주었다. 그렇게 형성된 커뮤니티에서 엄마들이 얼마나 깊은 내적 갈등을 경험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양육자들은 내적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 삶이 양육자로서 끝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과 하고 싶은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나에게 이 물음과 갈등을 해결할 힘과 열쇠는 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학함이 정답은 아니다. 난 철학을 좋아하고 완수하고 싶은 내 인생의 과업이라 생각했다. 나와 동일하게 대부분의 사람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하길 바란다.
병행될 수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불가능이라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믿는다. 육아는 나의 앞길을 막는 막다른 길이 아닌 새로운 지평을 여는 통로다.
만약 내가 육아를 하지 않고 가부장적 질서 안에 머물렀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아무리 철학을 해도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철학을 이해하고 학습했을 것이다. 그러나 육아를 통해 일어난 삶의 변화는 나의 이해의 지평을 확장시켜주었다. 육아는 막다른 길도 비용도 아닌 나를 확장시켜주는 위대한 과업이다.
그러므로 양육은 비용이 아니다. 양육은 나를 성장시키고 확장시키는 자양분이다.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철학적 해석학자인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지평 융합이란 개념을 말한다. 진리는 단독적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두 지평의 융합을 통해 확장됨으로 나타난다는 개념이다.
양육도 그렇다. 양육이라는 행위와 자신이 성취를 이루고 싶은 분야의 지평이 융합될 때, 우리는 자신을 더욱 확장해 나갈 수 있다.
나는 모든 양육자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 그리고 양육이 숭고한 가치라 해서 그것에만 매몰되지 않기를 권면하고 싶다. 양육자의 삶은 소중하다. 그러나 당신이 하고 싶고 펼치고 싶은 인생도 소중하다. 다만, 이 둘은 충돌 관계가 아닌 융합이자 종합의 관계로 당신을 확장시켜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