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완벽한 육아도 완벽한 아이도 없다

by 최정성

아들과의 둘만을 시간으로 통해 자괴감에 빠졌던 아내는 이후 아들과의 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갔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덕분에 자유시간도 조금 생겼다. 소위 말하는 육퇴라는 것을 즐길 수 있었다.


요즘 많이 쓰는 말 중에 독박 육아라는 말이 있다. 다행히 나는 독박 육아가 좋았다. 육아가 체질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자유 시간이 싫은 것은 아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늘 달콤하다.


육아 예찬론자로선 독박 육아라는 단어 때문에 육아에 대한 어떤 편견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독박은 부정적 어휘다. 이것이 육아와 붙을 때, 육아 행위 자체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될 우려가 있다.


육아는 숭고한 행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위는 누군가를 성장시키는 일이라 생각한다. 육아가 그렇다. 그리고 육아는 나 자신을 충만하게 만든다. 나를 통해 한 존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만들고, 행동의 목적을 설정해 나간다. 육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행위로 자기 자신을 전수하는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육아에 독박이란 단어를 붙여 버리면 육아는 일종의 비용을 지불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경제적인 비용이든 감정적 비용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지불하는 행위가 된다. 내가 육아는 비용이 아니라고 말해도 독박 육아라는 표현이 일상에 쓰이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미 사람들은 육아를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힘든 일이고 소비적인 일이며 비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육아는 힘든 일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 고단함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인정, 완전 인정! 그렇다면 육아가 힘든 이유는 육체적 고단함, 그것만 있을까?


나의 경험에서 육아의 가장 힘든 점은 정답의 문제이다. 과연 나는 잘하고 있을까? 우리 아이가 바르게 크고 있을까? 아이는 행복할까?라는 물음들이 일상에서 던져진다. 아이가 화를 내거나 감정적인 문제를 드러내면 양육자들은 자신의 양육법에 대한 의문을 넘어 회의에 빠진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를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양육자에게 엄청난 심리적 스트레스 상황으로 작용한다. 나 역시 이 지점이 늘 힘들었다. 내 아이가 완벽하게 좋은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 인성을 비롯해 어떤 문제도 없길 바라는 것은 부모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 바람은 다시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온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감정적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나의 경험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 역시 아이의 문제에 늘 고민을 했다. 그런데 답은 간단했다. 나의 양육 방법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또한 아이도 완벽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나의 역할은 아이를 완벽한 아이로 키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불완전한 인간인데 어떻게 아이를 완벽하게 키울 수 있겠는가? 나의 역할은 아이가 자신의 기질 안에서 자기 장점을 발견하고 행복하게 지내게 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하온이는 소심한 성격의 아이다. 장난꾸러기이지만 남들 앞에 서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누군가에게 인사를 해야 할 때도 아빠 뒤에 숨어 버리는 아이다. 그런 아들에게 왜 숨냐고, 당당히 인사하라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게 하온이의 기질이다.


인사뿐 아니라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온이는 보는 사람이 있으면 극도로 소심해졌다. 왜 넌 못해라고 질책해 봐야 절대 변하지 않는다.


답은 단순했다. 하온이가 완벽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그리고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아빠는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만 했다.


하온이의 경우 부끄러워 숨어버릴 때 다그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숨어들었다. 어쩌면 하온이의 행동은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다. 어른인 나도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무언가를 해야 하면 겁이 난다. 아이의 행동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이가 경험한 세계는 가족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숨어버린 아들을 꼭 안아 주었다. 품 안에 안긴 아들의 표정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행동에 아빠가 실망하지 않았을까라는 두려움이 크지 않았을까? 나는 아들을 품에 안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부끄러워해도 괜찮아. 아빠는 언제나 널 사랑해.”


아들이 숨지 않고 인사를 하는 데까지 무려 3년이 걸렸다. 여섯 살인 지금도 아주 가끔은 숨어버린다.


아들의 기질은 여전히 그대로다. 유치원 운동회에서 부끄럽다고 달리기 대회에 나가지 않는 아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것이 내 아들의 모습이기에 인정하고 사랑한다.


완벽한 어른이 없듯 완벽한 아이도 없다. 나의 양육법도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 인정될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그것은 대화다. 대화주의 철학의 아버지인 미하엘 바흐친은 말하는 것과 대화를 구분한다. 말하는 것은 나의 의견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대화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상호 소통 관계 안에서 발생된다. 여기서 상호 소통은 권위주의적 위계가 없을 때 발생된다. 바흐친은 이것을 카니발니즘에서 발견했다. 바흐친이 말하는 카니발니즘이란 관객과 공연자의 구분이 없는 상태이다. 일종의 질서의 전복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만 진정한 대화가 발생된다고 바흐친은 말한다.


이것을 육아에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아이를 양육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고정된 역할로 아이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육아라는 행위에서 아이와 내가 함께 만들어가는 심포니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발생되는 대화만이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된다.


나도 아이도 완벽하지 않는 동등한 존재라는 이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양육자에게 부여되어 있던 많은 짐을 내려놓게 해 준다.


인정하자. 나의 육아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 우리 아이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육아란 내가 아이를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아이의 공동의 행위라는 것을. 그때 육아는 비용이 아닌 놀이가 된다. 당신의 육아가 노동이자 비용이 아닌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이와 즐기는 놀이로서 육아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